비담이 난을 일으키다
(
647년
01월
)
[선덕여왕] 16년 정미(647년)는 선덕왕 말년이고 진덕왕 원년이다. 대신(大臣)인 비담(毗曇)註 106과 염종(廉宗)註 107은 ‘여자 임금註 108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그녀를 폐위시키고자 하니註 109, 왕은 스스로 [왕성] 안에서 그들을 방어하였다. 비담 등은 명활성(明活城)註 110에 주둔하였고 왕의 군대는 월성(月城)註 111에 진영을 두었는데, 공격과 방어가 10일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았다.
비담은 선덕왕 14년(645) 11월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었던 인물이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선덕왕 14년조).
관등과 직책은 알 수 없다. 비담의 난에 참여한 중심 인물이었는데, 단지 화백회의의 구성원인 대등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9쪽).
‘女主’는 女王을 낮추어 칭한 말이며, 「東國通鑑」등에서는 善德女主, 眞德女主라고 써서 폄하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9쪽).
비담 등이 일으킨 난은 선덕여왕의 임종 직전에 일어나 10일 만에 진압되었는데, 이 난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다. 우선 상대등의 왕위추대운동이라는 설(이기백, 「상대등고」, 《역사학보》 19, 1962 |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101쪽)이 있고 그것과 달리 화백회의의 국왕에 대한 퇴위 요구에 김유신 등이 여왕을 옹립함으로서 발단된 것으로 선덕여왕측이 일으킨 것이라고 보는 설(井上秀雄,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1974, 440~441쪽)이 있다. 뿐만 아니라 나물왕계의 씨족회의의 결의, 즉 선덕여왕의 폐위 내지는 비담의 국왕 추대에 불만을 품은 가야 출신 김유신이 선덕여왕을 옹호함으로서 발단이 되었으리라는 주장도 있으며(이기동,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 84쪽), 그밖에도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銅輪系의 反진지왕계 운동으로 보기도 하고(신형식, 「무열왕권의 성립과 활동」, 《한국사논총》 2, 1977 | 《한국고대사의 신연구》, 일조각, 1984, 116쪽)과 여왕이 재위하여 이웃 나라의 침입을 자주 받음으로써 선덕왕의 임종에 즈음하여 진덕여왕이 후계자로 정해진 것에 대한 반발 차원이었다고 이해하는 견해(주보돈, 「비담의 난과 선덕왕대 정치운영」,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상) -고대·고려시대편》, 일조각, 1994, 214~5쪽) 등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9~660쪽 참조).
현재 경북 경주시 보문단지 남쪽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둘레는 약 6,000m이다. 왜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추정되며,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자비왕 16년(473) 7월에 이 산성을 개수하였고, 동왕 18년(475)부터 소지왕 10년(488)까지 국왕이 이곳에 거처하였기도 하였다. 진흥왕 15년(554)에 이 산성을 다시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906보였고, 진평왕 15년(593)에 다시 개축하였는데 둘레가 3,000보였다고 한다. 1988년 明活山城碑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진흥왕 12년(551)의 개축시에 세워진 비석으로 알려져 있다(민덕식, 「신라의 경주 명활산성비에 대한 고찰」, 《동방학지》 74, 1992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0쪽).
신라의 궁성으로 현재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토성이다. 半月城, 新月城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시는 곳이라 하여 在城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둘레는 1,423보(2,400m)이고 동서 길이 900m, 남북 길이 260m이다. 파사왕 22년(101)에 월성을 쌓아 금성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으며, 유례왕 7년(290) 홍수로 성이 무너져 이듬해에 보수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0~661쪽).
註) 106
비담은 선덕왕 14년(645) 11월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었던 인물이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선덕왕 14년조).
註) 107
관등과 직책은 알 수 없다. 비담의 난에 참여한 중심 인물이었는데, 단지 화백회의의 구성원인 대등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9쪽).
註) 108
‘女主’는 女王을 낮추어 칭한 말이며, 「東國通鑑」등에서는 善德女主, 眞德女主라고 써서 폄하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9쪽).
註) 109
비담 등이 일으킨 난은 선덕여왕의 임종 직전에 일어나 10일 만에 진압되었는데, 이 난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다. 우선 상대등의 왕위추대운동이라는 설(이기백, 「상대등고」, 《역사학보》 19, 1962 |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101쪽)이 있고 그것과 달리 화백회의의 국왕에 대한 퇴위 요구에 김유신 등이 여왕을 옹립함으로서 발단된 것으로 선덕여왕측이 일으킨 것이라고 보는 설(井上秀雄,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1974, 440~441쪽)이 있다. 뿐만 아니라 나물왕계의 씨족회의의 결의, 즉 선덕여왕의 폐위 내지는 비담의 국왕 추대에 불만을 품은 가야 출신 김유신이 선덕여왕을 옹호함으로서 발단이 되었으리라는 주장도 있으며(이기동,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 84쪽), 그밖에도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銅輪系의 反진지왕계 운동으로 보기도 하고(신형식, 「무열왕권의 성립과 활동」, 《한국사논총》 2, 1977 | 《한국고대사의 신연구》, 일조각, 1984, 116쪽)과 여왕이 재위하여 이웃 나라의 침입을 자주 받음으로써 선덕왕의 임종에 즈음하여 진덕여왕이 후계자로 정해진 것에 대한 반발 차원이었다고 이해하는 견해(주보돈, 「비담의 난과 선덕왕대 정치운영」,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상) -고대·고려시대편》, 일조각, 1994, 214~5쪽) 등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9~660쪽 참조).
註) 110
현재 경북 경주시 보문단지 남쪽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둘레는 약 6,000m이다. 왜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추정되며,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자비왕 16년(473) 7월에 이 산성을 개수하였고, 동왕 18년(475)부터 소지왕 10년(488)까지 국왕이 이곳에 거처하였기도 하였다. 진흥왕 15년(554)에 이 산성을 다시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906보였고, 진평왕 15년(593)에 다시 개축하였는데 둘레가 3,000보였다고 한다. 1988년 明活山城碑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진흥왕 12년(551)의 개축시에 세워진 비석으로 알려져 있다(민덕식, 「신라의 경주 명활산성비에 대한 고찰」, 《동방학지》 74, 1992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0쪽).
註) 111
신라의 궁성으로 현재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토성이다. 半月城, 新月城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시는 곳이라 하여 在城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둘레는 1,423보(2,400m)이고 동서 길이 900m, 남북 길이 260m이다. 파사왕 22년(101)에 월성을 쌓아 금성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으며, 유례왕 7년(290) 홍수로 성이 무너져 이듬해에 보수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60~661쪽).
주제분류
- 정치>군사>반란>모의·作亂
색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