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에는 한국인들이 볼 때 매우 불쾌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을 잡아 해변에 데리고 가서 무릎뼈를 빼고 돌 위에서 기게 한 다음, 목을 베어 모래 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두어 재상으로 삼고 돌아왔다. 신라왕의 처가 재상을 유인하여 “왕의 주검을 묻은 곳을 가르쳐 준다면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재상이 알려 주자, 나라 사람들과 재상을 죽였다. 천황이 이를 듣고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멸망시키려 하였다. 그러자 신라 사람들이 서로 의논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였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있는 신공황후 시기의 기록은 신공황후의 업적을 부풀리기 위해 다른 시기에 있었던 사건과 인물을 끌어다 붙여 놓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시기의 기록은 있는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고 다른 기록과 비교하며 연도와 인물을 재배치해야 한다.
일본서기의 신라왕 살해사건은 삼국사기의 우로 피살사건과 유사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년)
우로가 왜국의 사신 갈나고를 접대하며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를 듣고 장군 우도주군을 보내 치니 우로가 "내가 당해내겠다"하고 왜군에게로 갔다. 왜인이 잡아서 불태워 죽인 다음 돌아갔다. 미추왕 때에 왜국의 대신이 왔는데 우로의 아내가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가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에 끌어 내 불태워 죽였다. 왜인이 분하여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삼국사기의 미사흔과 모말이 일본서기에 각각 미질허지와 모마리질지로 되어있는 점을 생각할 때, 삼국사기의 우로와 일본서기의 우류조부리지간이 같은 인물이 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신라왕 살해사건은 우로 피살사건과 동일한 사건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249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3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흘해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나해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각간 우로이고 어머니는 명원부인으로 조분왕의 딸이다. 기림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군신들이 의논해 말하기를, “흘해가 어리지만 노련한 덕이 있다.”고 하며 이내 그를 받들어 세웠다.
우로가 249년에 죽었다면 그의 아들 흘해 이사금은 310년에 60살이 넘게 된다. 60살이 넘어서 왕으로 즉위하는데 '어리지만 노련한 덕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에 있는 우로 관련 기록을 60년 뒤로 물려 보았다.
그러자 여러 가지 모순들이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1) 309년에 우로가 피살되고 이듬해인 310년에 그의 아들 흘해가 어린 나이지만 노련한 덕이 있는 왕이 된다.
(2) 신라는 300년에 왜와 사신을 교환한 뒤 왜에 대해 태도가 고분고분해졌는데 우로 피살사건을 309년으로 옮기면 그런 흐름과 일치한다. 왜가 우로의 실언을 응징하러 쳐들어 왔을 때 신라는 그를 보호해 주지 않았는데 이것은 312년에 왜왕이 혼인을 요청해 왔을 때 신라가 순순히 응해준 것과 분위기가 같기 때문이다. 344년에도 왜왕의 혼인요청이 있었는데 그때는 신라가 거부하였고 이듬해에 왜의 침공을 받았다.
(3)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에는 사로국이 진한과 변한에 있는 24개의 작은 나라 중 하나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삼국사기에서 249년 이전에 있었다고 하는 우로의 활약과 어울리지 않는다. 당시의 한국은 아래의 기록을 통해 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237-239 삼국지(三國志 289)
명제가 대방군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두 군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의 신지에게는 읍군의 인수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을 주었다.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신지과 한인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 때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준은 전사하였으나 두 군은 마침내 韓을 멸하였다.
그 밖에도 우로에 관한 기록을 60년 뒤로 옮기면 더 어울리는 부분이 있다.
292-06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왜병이 사도성(沙道城)을 공격해 함락하자 일길찬 대곡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고 지키게 하였다.
293-07(<-233)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이찬 우로가 왜인과 더불어 사도(沙道)에서 싸웠는데, 바람을 이용해 불을 놓아 배를 불태워서 적이 물 속에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
해를 이어 사도에서 왜와 싸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아래 기록도 60년 뒤로 물려야 당시 상황과 어울린다.
305(<245-10)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을 지켰다. 그날 밤이 몹시 추웠는데, 우로가 사졸들을 위로하고 몸소 장작을 피워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니 모두 마음으로 감격하였다.
245년은 위(曺魏)의 공격을 받아 고려의 도읍이 함락되고 고려왕이 옥저까지 쫓겨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또 당시는 낙랑과 대방이 강성해서 고려와 신라는 국경을 접하지도 않았다. 305년이라면 낙랑과 대방이 망하기 전이라 쪼그라들어 있었을 테니 고려와 신라가 접할 수 있다.
요컨대, 우로 피살사건은 309년에 발생한 사건인데 삼국사기는 60년 앞선 것으로 잘못 기록하였고 일본서기는 신공황후의 업적을 부풀리기 위해 이 사건을 신공황후의 치세시기인 320(<200)년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