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4,389명의 인물들을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였다.
이 사전에는 일조시대 하급장교부터 각종 사회단체의 주동자까지 광범위한 한국인들을 친일인사로 분류하여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전에서처럼 만주국군 소위를 친일로 규정해 놓으면 그런 장교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도 모두 내면적 친일이 되어 버린다. 또 조선미술가협회와 같은 단체의 간부들을 친일로 규정해 놓으면 그 협회의 나머지 회원들도 모두 미미하나마 친일이 되어 버린다. 이런 식으로 친일인명사전은 일조시대를 살았던 거의 모든 조선인들을 친일의 범주에 넣어 버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친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는 '일본과 친함'이란 뜻이 되겠지만 실질적으로 쓰이는 의미는 '이씨조선 말기에서부터 대동아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시기에 일본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지지하고 협력하여 이익을 얻음'이라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서 '반민족 배신자'란 뜻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살펴 본 바, 친일인명사전은 당시의 한국인 대부분을 친일의 범주에 넣은 것이니 곧 민족 구성원 대부분을 '반민족 배신자'로 규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민족 전체를 부정하는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모순은 친일인명사전이 보편적인 체제청산의 맥락에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념과 질서는 내부적인 모순이나 외부적인 힘에 의하여 급격히 바뀌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체제교체는 반드시 실패한 구체제에 대한 청산작업을 동반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사에서 체제청산작업은 여러 차례 일어났다. 바로 신라의 한국통일, 신라-왕씨고려의 왕조교체, 왕씨고려-이씨조선의 왕조교체 그리고 이씨조선-일본령조선의 체제교체에 수반된 청산작업을 들 수 있다.
한국사에서의 체제청산은 대부분 인적청산이 없는 평화적인 작업이었다. 한국통일의 시기에는 백제와 고려의 왕과 귀족들이 대부분 당나라나 왜의 지배체제로 흡수되었고 남은 사람들도 신라의 지배체제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구체제의 지배세력에 대한 인적청산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라와 왕고의 교체기에도 신라와 견훤백제의 지배세력들이 모두 왕고의 지배체제로 편입되어 역시 인적청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씨조선이 일본제국으로 흡수될 때에도 신라가 왕고로 흡수될 때와 매우 유사한 양상을 띠었다. 예외가 있다면 왕고에서 이조로의 교체기에 왕고의 왕족들이 모두 몰살당하는 철저한 인적청산이 이루어졌다는 것 뿐이다. 체제청산은 역사발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연적인 과정이지만 그 방법은 평화적인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사람들은 일제가 민족독립을 주장하는 한국인들을 고문하고 죽였다거나 사람들을 끌어가 전쟁과 노역 그리고 매춘을 강요한 예를 들어 한국사에 존재했던 다른 체제청산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일제가 한 일들은 이전의 왕조들에서도 모두 했던 것들로 일제의 지배만이 사악하고 가혹했다고 할 수 없다.
또 이전의 체제교체는 민족내부의 변혁이었지만 일본령 조선은 이민족에 의한 통치이므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라의 백제병합도 당시로서는 이민족에 의한 지배와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한민족은 한국통일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단일정치공동체를 유지하면서 비로소 형성된 것이며 그 이전의 신라와 백제는 한 민족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라가 내세웠던 ‘삼한일통’은 일제가 내세웠던 ‘내선일체’나 ‘대동아공영’과 그 역할이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성공하였다는 것이고 후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대동아 전쟁이 끝나기 전 일본령 조선에서는 '아시아의 제 민족이 힘을 합쳐 영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워야한다'는 주장이 선이었고 '각 민족이 자신들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과 악의 구분은 대동아 전쟁의 결과가 뒤바꾸어 놓아 전자는 악이 되었고 후자는 선이 되었다. 이렇게 선과 악이 엎치락뒤치락 뒤바뀌는 현상은 몇 년 후 한반도에서 더욱 심하게 일어난다. 인민군이 주둔하면 공산주의가 선이요 자본주의는 악이었고 국군이 주둔하면 그 반대가 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서 볼 때 사회체제는 선과 악이 따로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득세했느냐 실세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일본령조선에 대한 청산작업도 체제교체에 따른 청산작업의 일환이라는 시각으로 접근해야지 절대악을 응징한다거나 이전의 한국사에서 행해졌던 체제청산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 의미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청산작업에 나서야만 구체제에 축적되었던 모순을 제대로 해소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과제를 보다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