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교체에 따른 청산작업의 바람직한 원칙을 생각해 본다.
첫째, 구체제의 질서를 주도하고 그로부터 특권을 누린 지배세력에 대해서는 실패한 체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일조시대에 대한 책임도 그 당시의 지배세력이라 할 수 있는 이씨왕족이나 고관들이 져야 한다. 이 책임은 도덕적 책임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이다. 일조체제의 질서를 주도하고 그로부터 특권을 누린 사람들이니 그 체제가 붕괴하였다면 마땅히 자신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둘째, 구체제의 질서를 악용하여 민중들을 괴롭힌 사람들에 대해서는 민중을 괴롭힌 악행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조선인들을 붙잡아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고문하고 괴롭힌 고등계 형사들이 실려 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체제질서를 악용하여 민중들을 괴롭힌 이런 악당들은 있어왔다. 조선시대에도 농민들을 붙잡아 동학난에 가담한 혐의를 씌워 고문하고 죽인 지방수령들이 있었고 대한민국에서도 시민들을 붙잡아 공산주의 운동을 한 혐의를 씌워 괴롭힌 경찰들이 있었으며 김씨조선에서도 인민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학대하거나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낸 보위부 요원들이 있었다. 체제질서를 악용하여 민중들을 괴롭힌 이런 사람들에게는 친일이라는 정치적 책임을 묻기보다는 민중을 괴롭힌 데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셋째, 구체제가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하며 살았던 민중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정치적 도덕적 책임도 묻지 말아야 한다.
일제가 실시한 창씨개명에 참여한 한국인들은 전체 인구의 약 80%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한국인들 대부분은 궁성요배와 신사참배 등 그들이 요구하는 질서를 받아들이고 살았다. 이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바람이 불면 누웠다가 바람이 잦아들면 다시 일어서며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풀 같은 존재가 바로 민중들이다. 어떤 체제든지 ‘대동아공영’이니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며 제 나름의 이념을 내세우며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지만 민중들에게는 자신들이 생존하고 번성해야 한다는 영구불변의 이념이 있다. 체제가 실패하면 그 체제에서 특권을 누린 지배세력이 그 정치적 책임을 질 것이지 먹고 살기 위해서 지배세력이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한 민중들에게 그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친일인명사전은 잘못된 점이 많다.
첫째, 정치적 책임을 져야할 지배세력의 일부가 빠져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이은을 들 수 있다. 그는 일본군 중장의 계급까지 올라 제1항공군 사령관까지 지냈던 사람인데 이 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씨왕족은 일본통치에 협력하고 그 대가로 특권을 누려왔으니 당연히 친일인명사전에 올려야 한다.
둘째,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람들까지 광범위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 박정희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이조체제를 일조체제로 바꾸는데 기여하거나 일조체제에서 질서를 주도하고 특권을 누린 사람이 아니다. 체제의 질서를 악용하여 민중을 괴롭힌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강직한 성품을 타고 나는 바람에 군인으로서 조국을 위해 온 몸을 불살랐을 뿐이며 그 조국이 태어날 때에는 일본이었는데 성년이 되어서 한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특권세력도 아니고 민중을 괴롭힌 악한도 아닌 이런 사람들은 모두 친일인명사전에서 빼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