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가 세워지게 된 계기를 만든 사람은 임종국이다. 그가 쓴 유명한 ‘친일문학론’에는 저자 자신에 대해 쓴 자화상이란 글이 있는데 거기서 임종국은 자신이 17세였을 때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내용을 소개해 놓고 있다.
하루는 친구 놈한테서 김구 선생님이 오신다는 말을 들었다.
"그 김구 선생이라는 이가 중국 사람이래!"
"그래? 중국 사람이 뭘 하러 조선엘 오지?"
"임마 것두 몰라! 정치하러 온대."
"정치? 그럼 우린 중국한테 멕히니?"
한국어를 제외한 모든 관념, 이것을 나는 해방 후에 얻었고 민족이라는 관념도 해방 후에 싹튼 생각이었다.
일조시대는 이런 상황이었는데 군인이 되고 싶어 일본군에 입대한 청년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우리는 일조체제에 대한 청산작업에 있어서 겸손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 오늘날의 기준으로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을 매도하는 것은 매우 오만한 태도다. 지금 대한민국을 찬양하고 대한민국의 국군이나 경찰로 복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대한민국이 붕괴되어 전혀 다른 이념과 질서를 가진 체제로 바뀐다면 그들도 반드시 체제청산작업의 심판대에 오를 것인데, 그 때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고 단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은 많은 인력이 투입되어 만들어진 방대하고도 세밀한 자료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애써 감추어 왔던 일조시대의 생활상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자료이기도 하다. 또 독립운동 중심의 편향된 국사교과서 기술에서 벗어나 일제가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하며 살았던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도 역사적 조명을 비추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들 역시 역사의 주체이며 소외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친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이 사전은 그 내용으로 보았을 때 '친일인명사전'보다는 '일본령조선인물사전(日本領朝鮮人物事典)'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요컨대, 사전의 이름을 바꾸던지 정치적 책임이 없는 사람들을 빼던지 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초기에 민족국가로서의 기반을 견고하게 다지기 위해 민족주의를 강조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어느 정도 견고한 나라로 성장한 지금도 그러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이제 일조체제에 대한 청산작업도 이성적인 자세로 접근할 때가 되었다.
또 일조체제에 대한 청산작업에 이어 김씨조선의 붕괴에 따른 체제청산작업도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 작업은 전쟁과 테러에 대한 범죄와도 연결이 되어 있어 다소 문제가 복잡하다. 그러나 역시 보편적인 체제청산작업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미래지향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