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고려·百濟 건국설화
by Silla on 2022-12-27
부여 동명설화는 부여 북쪽의 어떤 나라에서 왕을 모시는 시녀가 하늘의 정기를 받아 임신을 하고 동명을 낳았는데 그가 활을 잘 쏘자 시기를 받아 쫓기게 되었고 하늘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부여를 세웠다는 이야기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는 지배자의 혈통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그리스의 Perseus설화나 기독교의 Jesus설화에서도 나타난다.
활을 잘 쏜다는 이야기는 지배자로서의 능력을 보증하는 것으로 왕씨고려의 건국설화나 이성계설화에서도 나타난다.
하늘의 도움으로 물을 건넌다는 이야기는 지배자에게 하늘의 마음이 있다는 것으로 기독교의 Moses설화나 이씨조선의 건국설화에서도 나타난다.
부여 동명설화는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부여 동명설화가 수록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 論衡(80) 橐離 產子 掩水
┆ 魏畧(265?) 高離 生子 施掩水
┆ 後漢書(445) 索離 生男 掩㴲水
┆ 梁書(636) 櫜離 生男 淹滯水
┆ 隋書(636) 高麗(高離의 오기) 生一男 淹水
┆ 北史(659) 索離 生男 淹滯水
┆ 通典(801) 索離 掩㴲水

부여는 285년에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의려왕은 자살하고 왕자들은 옥저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28년에 추모왕에게 복속되었었는데 410년에 광개토왕이 동부여를 복속시킨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부여의 유민에 의해 점유되었던 듯하다.
이로써 부여 동명설화는 왕조를 뒷받침하는 이야기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한편, 고려의 건국설화도 생겨났는데, 그 내용은 부여에서 도망나온 주몽이 강을 건너 고구려를 세운다는 것으로 이야기 구조는 부여 동명설화와 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알에서 나왔다는 이야기와 하백의 딸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더해졌다는 점이다.
이 고려 주몽설화는 고려의 전성기였던 광개토왕의 시기에 고씨 왕성과 함께 만들어져 435년에 장수왕이 북위와 교류할 때 북위에 알려진 듯하다.
고려 주몽설화가 수록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 廣開土王陵碑(414) 北夫餘 剖卵降世 鄒牟(朱蒙의 다른 표현) 奄利大水 忽本
┆ 魏書(554) 夫餘 生一卵 朱蒙 紇升骨城 以為氏
┆ 周書(636) 夫餘 朱蒙 紇斗骨城 髙為氏
┆ 隋書(636) 夫餘 生一大卵 朱蒙 高為氏
┆ 北史(659) 夫餘 生一卵 朱蒙 紇升骨城 高為氏
┆ 通典(801) 夫餘 朱䝉 普述水 紇升骨城 髙為氏
┆ 三國史記(1145) 東扶餘 生一卵 朱蒙 淹㴲水 卒本川 髙爲氏

한편, 백제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이 모여 백제 건국에 관한 억측이 만들어졌다.

① 論衡(80)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 名東明 因都王夫餘 북쪽 오랑캐 탁리국의 왕을 모시는 계집종이 임신을 하였다.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 부여를 세웠다.
② 三國志(289) 公孫度 以夫餘王尉仇台 妻以宗女 공손탁은 부여왕 위구태에게 일족의 딸을 시집보내었다.
③ 三國志(289) 公孫康 分屯有縣以南荒地 爲帶方郡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었다.
④ 魏書(554) 百濟國其先出自夫餘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로부터 나왔다.

먼저 주서(636)는 ②, ③ 그리고 ④를 섞어 이렇게 기술했다.

❺ 周書(636) 百濟 仇台者始國於帶方 구태가 대방에 처음으로 백제를 세웠다.

②와 ④가 결합하는 중간 단계는 통전(801)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百濟即後漢末夫餘王尉仇台之後(後魏時百濟王上表云臣與髙麗先出夫餘)
백제는 후한말 부여왕 위구태의 후예다. (북위때 올려진 백제왕의 표문에 자신과 고려의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다.)

수서(636)는 여기에 ①을 더하여 이렇게 기술하였다.

❻ 隋書(636) 百濟 夫餘東明之後有仇台者 始立其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부여를 세운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자가 있었는데 대방의 옛 땅에 백제를 세우자 한나라의 요동태수 공손탁이 그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구태가 백제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주서(636), 수서(636), 북사(659), 통전(801) 그리고 책부원구(1013)에 실려 있다.
삼국사기(1145)에는 주몽에게서 갈라져 나온 비류와 온조가 백제를 세운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북부여의 주몽이 난을 피해 졸본부여로 와 부여왕의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두고 나중에 왕이 되었는데, 북부여에서 주몽의 큰 아들이 오자 비류와 온조는 갈라져 나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정착했다가 비류가 실패해서 죽자 위례성으로 합쳐 백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아래의 기록들로부터 짐작해 볼 수 있는 백제인들의 인식과 어긋나지 않는다.

① 백제 귀수왕의 후손이 왜에 한 말
夫百濟太祖都慕大王者 日神降靈 奄扶餘而開國 天帝授籙 摠諸韓而稱王
대저 백제의 태조 도모대왕은 태양신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부여에 머물러 나라를 열었습니다. 천제가 녹을 주어 모든 한을 통솔하고 왕을 칭하게 하였습니다.

②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했던 말
臣與高句麗源出夫餘
신과 고구려는 원래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③ 백제 무령왕의 후손을 통해 왜가 알게 되었을 듯한 인식
其百濟遠祖都慕王者河伯之女感日精而所生
그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이라는 사람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④ 백제 성왕이 국호를 바꾼 일
移都於泗沘 國號南扶餘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비류와 온조 이야기는 주몽이 자력으로 왕조를 세운 것이 아니라 비류와 온조의 외가로 장가와서 그 가문을 물려받아 왕조를 세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따라서 그 왕조는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유류보다 비류와 온조에게 물려졌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것이 고려와의 경쟁에서 장자와 서자의 차이가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백제가 주몽을 시조로 내세우는 이유일 듯하다.
한편, 삼국사기가 인용한 사서에는 부여 동명설화와 고려 주몽설화가 별개로 수록되어 있어 혼동의 여지가 없는데, 삼국사기는 동명과 주몽을 동일인으로 취급했다.
이것은 고려왕조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
누가 봐도 주몽설화는 동명설화를 베낀 것이 분명하고 주몽과 동명을 뭉뚱거려 놓으면 건국설화를 베낀 것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고려왕이 신나라에 의해 살해된 것을 고려 장수가 살해된 것으로 날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