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자신도 원통해 한 일인데 왜 그는 처녀 진헌을 거부하지 못했을까?
만약 처녀 진헌을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처녀를 바치지 않는다고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오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씨왕조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사소한 일 같지만 명나라가 이씨왕조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이씨왕조에게 큰 재앙이 될 수 있다.
첫째, 이씨왕조가 왕조를 개창한 지 30여년 밖에 안 된 신생 왕조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아직 지배자로서의 인식을 국내외에 견고하게 심어놓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정통성이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천자국을 자처하는 명나라가 흔들어 대면 이씨왕조로서는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둘째, 이씨왕조는 태생자체가 명나라에 기대어 생겨났을 만큼 명나라에 의존적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륙에서 당과 송이 교체될 때 한반도에서 왕씨고려가 신라를 교체할 수 있었듯이 이씨조선이 세워질 무렵에도 대륙에서 원과 명이 교체되는 시기여서 이성계가 왕씨고려를 무너뜨리는 것이 가능했다. 또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한 것도 명나라를 치러가는 고려군을 되돌린 위화도 회군 때문이었는데 이 사건을 통해서 이성계는 명나라의 신임을 얻어 새 왕조창업에 명나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씨조선의 국호가 결정되는 과정을 보면 이씨조선이 얼마나 명나라의 권위에 의존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이 명나라의 처녀요구를 거부하지 못했던 것은 단지 이씨왕조의 지배체제가 흔들림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봉건시대를 살았던 세종에게 왕조의 이익 대신 백성의 이익을 선택했어야 한다고 시비를 따지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늘날의 대통령이야 국민들이 뽑지만 봉건시대의 왕은 천자로부터 호감을 얻어야 정통성을 부여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