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의 사민
by Silla on 2021-01-27
ᐥ패망 당시 고려에는 69만 호가 있었는데 이중 15만 호가 고려인이었다. 인구로는 70여만 명이 되는데, 이 중 30여만 명은 당나라 내 각지로 흩어지고 10여만 명은 신라로 왔으며 10여만 명은 말갈로 갔고 1만여 명은 돌궐로 갔다.ᐥ
사서의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는 패망 당시 176성 70여만호가 있었는데 당나라는 이를 9도독부 42주 1백현으로 재편하고 안동도호부를 두어 총괄하게 하였다. 도호에는 설인귀 장군을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다스리게 하였고 고려의 추장 가운데 공이 있는 자를 뽑아 도독, 자사 및 현령의 관직을 주어 당나라 관리와 함께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고려인 2만 8천호는 중국 내지인 강회와 산남으로 옮겼다. 이후 겸모잠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호부의 치소를 요동으로 옮기고 보장왕을 데려다 요동도독 조선군왕으로 삼아 남은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내지로 이주시킨 고려인도 돌려보내주었다. 그러나 보장왕이 말갈과 내통하여 반란을 도모하자 그를 귀양보내고 고려인들도 하남과 농우로 이주시켰다. 다만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은 그대로 안동에 머무르게 하였다. 돌궐과 말갈로 흩어진 고려인들도 많았다. 


중국의 광명일보가 고려의 패망 이후 일어난 주민들의 이동을 추정한 자료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 자료를 보면 고려인의 3/5은 당나라로 흡수되고 1/5만 신라로 온 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분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의 인적 구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고려 왕조의 선조는 부여에서 왔다. 처음에 부여의 남쪽, 조선과 예(濊)의 북쪽 그리고 옥저의 서쪽에서 왕국이 형성되었다. 중국인들은 그들을 맥인(貊人)이라 불렀다. 고려는 주변의 예(濊)와 옥저 그리고 부여를 병합하며 성장하다 낙랑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맥인 내에서 형성된 지배 세력이 새 도읍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다. 낙랑은 원래 조선이었는데 한나라에 병합되면서 한족들이 많이 이주해 와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앞선 중국 문화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지배 세력으로 많이 편입되었을 것이다. 낙랑이 200년 넘게 왕국의 중심이 되면서 낙랑과 대방 지역의 사람들도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 학자들은 이들을 ‘구려족’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 외에도 고려에는 여러 종족이 있었는데 그 중 말갈의 비중이 컸다. 말갈은 본래 물길이라 불렸는데 옛 숙신 땅에 있었다. 위나라 시기에 물길은 속말부, 백돌부, 안차골부, 불녈부, 호실부, 흑수부, 백산부 등 7부가 있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흑수말갈과 속말말갈이 있었는데 모두 고려에 부속되었다.

중국 학자들은 패망 당시 고려에는 69만 호가 있었는데 이중 15만 호가 고려인이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인구로는 70여만 명이 된다. 이 70여만 명 중 30여만 명은 당나라 내 각지로 흩어지고 10여만 명은 신라로 왔으며 10여만 명은 말갈로 갔고 1만여 명은 돌궐로 갔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20여만 명은 유민이 되어 흩어지거나 죽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래서 고려인의 1/5정도만 신라로 왔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수치의 많고 적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고려인의 일부만 신라로 왔다고 하는 경향성은 뒤집을 수 없을 것이다.

고려인이 당나라로 많이 흡수되었다는 사실은 당나라에서 큰 활동을 했던 고려의 후예들을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구당서(945)와 신당서(1060)에는 고려의 후예로서 당나라에서 큰 족적을 남긴 고선지, 왕모중, 왕사례, 이정기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모두 당나라에서 출생했고 대부분 당나라 장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군문에 들어갔다.

고선지는 당나라 장수 고사계의 아들이다. 747년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티벳의 군사기지인 연운보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힌두쿠시 준령을 넘어 소발율국의 수도 노월성을 점령하고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차단하였다. 750년에는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을 토벌하고 그 나라의 국왕을 포로로 잡아왔다. 751년에는 서역 각국과 사라센이 연합하여 쳐들어오자 7만의 정벌군을 이끌고 출전하였으나 탈라스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755년 안녹산의 난이 발생하자 이을 평정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누명을 쓰고 참수되었다.

왕사례는 당나라 장수 왕건위의 아들이다. 755년 일어난 안녹산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벼슬이 사공에 이르렀다.

왕모중 또한 당나라 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현종의 책사로 활약했으나 훗날 처형되었다.

이정기는 당나라로 이주한 고려 사민의 후예다. 안사의 난에 공을 세워 절충장군이 되었다가 765년에는 고종사촌형인 절도사 후희일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올랐다. 이후 전쟁이나 반란군 토벌에 여러 차례 참여하여 공을 세우면서 15주를 차지하는 큰 세력이 되었고 778년에는 당나라 황실의 호적에까지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781년 그가 죽었을 때에는 관직이 ‘평로치청절도관찰사 사도태자태보동 중서문하평장사’였는데 이 직위는 그의 아들 이납에게 이어졌다가 792년에는 이납의 아들 이사고에게 이어졌고 806년에는 이사고의 동생 이사도에게 이어졌다. 그러나 이사도는 당나라 조정과 대립하다 819년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