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5. 고려는 우리 역사인가? > (5) 고려의 해체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試論 - 邊衆
중국학자들의 최근 연구 성과에 의하면 멸망 시 고구려인 숫자는 대략 70여만 명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30여만 명이 중원 각지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신라에 귀의한 사람은 10만 정도였고, 말갈(발해)에 의탁한 사람은 10만 이상, 돌궐로 옮겨간 고구려인은 1만여 명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하면 대략 50여만 명 정도가 네 방면으로 이주한 셈이 되는데, 나머지 20여만 명은 요동 각지로 흩어져 유민이 되고, 전쟁 와중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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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사편찬위원회 - 고려유민의 동향
고려 유민을 (1) 당에 의해 중국 내지로 끌려간 사람, (2) 신라로 넘어간 사람, (3) 요동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 (4) 부여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 (5) 만주에 거주하던 사람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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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68 구당서(945舊唐書 後晉·劉昫等)
고려국은 지난날에 5부로 나뉘어져 176성 69만 7천호가 있었다. 이에 그 땅을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현으로 하고 또 안동도호부를 두어 총관케 하였다. 추장 가운데 공이 있는 자를 뽑아 도독, 자사 및 현령을 제수하여 화인(華人)과 함께 백성을 참리하게 하였다. 이어서 좌무위대장군 설인귀를 보내어 군사를 통괄하고 진무케 하였다. 그 뒤에 흩어져 도망간 자가 상당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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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68-09 신당서(1060 新唐書 宋·歐陽修、宋祁)
장(藏 보장왕)과 남건 등을 사로잡고 5부의 176성과 69만호를 몰수하였다. 조서를 내려 적(勣)에게 지름길을 택하여 소릉(당태종의 무덤)에 헌부하고 개선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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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68-09-21 삼국사기(1145)
당군과 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에 이르러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가 영공을 따라갔고 인태 의복 수세 천광 흥원 등도 좇아 갔다. 처음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을 출발하여 평양에 이르러 힐차양에 도착하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한성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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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68-12 신당서(1060 新唐書 宋·歐陽修、宋祁)
그 나라의 땅을 9도독부 42주 1백현으로 분할하였다. 다시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추거(추장) 가운데 공이 있는 자를 뽑아서 도독, 자사, 령에 각각 제수하여 화관(華官)과 더불어 참치하게 하였다. 설인귀를 도호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진무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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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69 신당서(1060 新唐書 宋·歐陽修、宋祁)
고려민 3만명을 강회와 산남으로 옮겼다. 고려의 대장 겸모잠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보장왕의 외손 안순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안순이 겸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고간은 도호부의 치소를 요동주로 옮기고 반란군을 안시에서 격파하고 또 천산에서 쳐부수고 신라의 원병 2천명을 사로잡았다. 이근행은 그들을 발로하에서 쳐부수고 다시 싸워서 포로와 참수한 수가 1만에 이르렀다. 평양의 패잔병들은 신라로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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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69-05 구당서(945舊唐書 後晉·劉昫等)
移高麗戶二萬八千二百,車一千八十乘,牛三千三百頭,馬二千九百匹,駝六十頭,將入內地,萊、營二州般次發遣,量配于江、淮以南及山南、並、涼以西諸州空閒處安置。고려의 2만 8천호와 수레 1천 80승, 소 3천 3백두, 말 2천 9백필, 낙타 60두를 내지로 끌고 왔다. 내주, 영주 2주 백성을 보내어 강회 이남과 산남에 병주, 양주의 서쪽 빈터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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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70-04 삼국사기(1145) 문무왕 10년
고구려 수임성(水臨城) 사람인 대형(大兄) 모잠(牟岑)이 남은 백성들을 모아서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 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서 고구려 대신(大臣)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인 안승(安勝)을 보고 한성(漢城)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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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76-686 구당서(945舊唐書 後晉·劉昫等)
676년과 678년 사이에 보장왕을 개부의동삼사 요동도독을 제수하고 조선왕에 봉하여 안동에서 살며 본번을 진무하는 주로 삼았다. 보장왕은 안동에 이르러서 몰래 말갈과 서로 통하여 모반을 꾀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소환하여 공주로 유배시켰다. 나머지 사람들은 하남과 농우의 여러 주에 분산하여 옮겼는데 그 가운데 빈약한 자는 안동성 부근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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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77 신당서(1060 新唐書 宋·歐陽修、宋祁)
보장왕에게 요동도독을 제수하고 조선군왕에 봉하여 요동에 돌아가 남은 백성을 안무케 하였다. 이에 앞서 내주에 편입되어 있던 교민을 모두 용서하여 돌려보내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겼다. 보장왕이 말갈과 반란을 꾀하여 공주로 추방하고 나머지 교민들은 하남과 농우로 옮겼다. 노약하고 빈곤한 자는 안동에 머물러 두었다. 예전의 성들은 왕왕 신라에 편입되었다. 유민들은 흩어져 돌궐과 말갈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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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85-820 신당서(1060 新唐書 宋·歐陽修、宋祁)
685년과 688년 사이에 보장왕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 698년과 699년 사이에 좌응양위대장군에 진수시키고 다시 충성국왕에 봉하여 안동구부를 통섭시키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이듬해에 보장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으니 이 뒤로 조금씩 나라의 틀이 잡혀갔다. 806년과 820년 사이에 사자를 보내어 악공을 헌상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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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90-691 구당서(945舊唐書 後晉·劉昫等)
당시의 혹리 내준신이 일찌기 헌성에게 재물을 요구하였는데 헌성이 거절하여 답을 아니한 적이 있었다. 드디어 준신의 원한을 사게 되어 모반했다고 무고하므로 목졸라 죽였다. 뒤에 측천무후가 그의 억울함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에 추증하고 예을 갖추어 개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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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98 구당서(945舊唐書 後晉·劉昫等)
698년에 (보원을) 좌응양위대장군에 진수시키고 충성국왕에 봉하였다. 안동의 구호를 맡겨 통섭시키려 하였으나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 699년에 보장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도독에 제수하여 본번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안동에 있는 고려의 구호가 점차 줄어들어 돌궐과 말갈 등에게로 흩어지자 고씨의 군장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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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민
 李正己 - 구당서(945)    王思礼 - 구당서(945)    王毛仲 - 구당서(945)    高仙芝 - 구당서(945)    高仙芝 - 신당서(1060)    黑齒常之 - 구당서(945)  
 
 여진족이 된 예맥과 옥저 그리고 부여
고려에 통합되었던 맥(貊), 예(濊), 옥저 그리고 부여는 왕씨고려의 기록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자리에 여진이 나타나는데 東, 西, 흑수, 말갈 등과 조합하여 다양한 명칭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크게 압록강 유역의 서여진과 마운령 북쪽의 동여진으로 나누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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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 세력
 0679 천남생묘지명    0700 고자묘지명    0701 천헌성묘지명    0702 천남산묘지명    0779 고진묘지명    조선일보: 1300년전 唐나라에 끌려간 망국의 원혼들  
 
 ¦1. 지배 세력의 이동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은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자 당나라로 끌려갔다. 그러나 실권이 없었던 왕으로 평가되어 전쟁에 대한 책임을 면하고 '사평태상백'의 작위를 받았다. 677년에는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봉해져 요동으로 돌아왔으나 말갈과 내통하여 반란을 꾀하다 발각되어 유배되었다. 682년에 죽어 위위경으로 추증되었다. 당나라는 686년 보장왕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고 698년에는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올렸다가 다시 충성국왕에 봉해 안동의 옛 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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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일반 사람들의 이동
사서의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는 패망 당시 176성 70여만호가 있었는데 당나라는 이를 9도독부 42주 1백현으로 재편하고 안동도호부를 두어 총괄하게 하였다. 도호에는 설인귀 장군을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다스리게 하였고 고려의 추장 가운데 공이 있는 자를 뽑아 도독, 자사 및 현령의 관직을 주어 당나라 관리와 함께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고려인 2만 8천호는 중국 내지인 강회와 산남으로 옮겼다. 이후 겸모잠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호 ...
http://qindex.info/i.php?f=1940#2536
 
 ¦3. 영토의 귀속
고려를 구성했던 맥(貊), 예(濊), 옥저 그리고 부여가 모두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http://qindex.info/i.php?f=1940#2538
 
 ¦신라가 차지한 건 대방
676년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옮겨가자, 신라는 694년에 송악성과 우잠성을 쌓고 713년에 개성을 쌓았으며 735년에 당(唐)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통치를 허용받은 뒤, 748년에 비로소 대곡성 등 14개의 군현을 두었다. 이어 762년에는 오곡 휴암 한성 장새 지성 덕곡의 6개 성을 쌓고 782년에는 한산주 백성들을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826년에는 우잠 태수로 하여금 패강 장성 300리를 쌓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f=194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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