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뿌리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開城王氏는 황제 顓頊의 후손 祖明이 東海를 건너와 平壤 일토산 아래에 정착하였고 그 후손 受兢이 箕子로부터 王氏 성을 하사 받았으며 그 먼 후손이 王建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낙랑 유민들의 묘지명에 나오는 樂浪王氏 이야기와 유사하다.
거기에는 樂浪王氏가 箕子의 후손인데 周武王이 箕子를 朝鮮에 봉했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王을 성씨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王建이 호족으로 있던 開城은 원래 樂浪郡에 속해 있던 곳이기 때문에, 開城王氏의 이야기는 王建의 뿌리가 樂浪王氏처럼 樂浪의 상류 계층이었던 것을 암시한다.
'뿌리를 찾아서'에 실려 있는 개성왕씨의 연원을 보면 왕건의 조상은 중국 황제 헌원의 17세손인 조명으로 나온다. 기자조선과 신라의 조정에 참여했다고 한다. 반면 고려사에는 왕건이 당나라 숙종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다.
어쨋든 왕건과 고려와의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건이 호족으로 있었던 송악이 200여년 전에 고려의 땅이었다는 것만이 왕건과 고려를 연결시켜 줄 수 있을 뿐이다.
그 지역은 350여년 동안 고려의 땅이었지만 그 전에는 400여년 동안 낙랑군 또는 대방군의 영역이었고 왕건이 고려를 세우기 전에는 200여년 동안 신라의 땅이었다.
왕건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말로는 고려보다 대방이 더 잘 어울린다.
낙랑과 대방에 왕씨 성을 쓰는 중국인들이 다수 살았다는 사실은 중국에서 발견되는 여러 묘지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낙랑과 대방이 고려에 흡수될 때 한족의 일부가 고려의 지배체제로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당시에 축조된 고분의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대방 지역은 고려와 신라 때도 중국과의 교류 창구로 계속 이용되었을 것이다. 왕건 설화에도 당나라로 가는 상선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인천에 화교가 많았듯이 대방 지역에도 한족이 다수 건너와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왕건이 내세운 고려계승이라는 명분에는 왕건의 뿌리가 고려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중국계 혈통이라고 한 것은 그만큼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한편, 왕건 설화는 특이하게도 왕건의 조부 작제건의 모계에 대해서 매우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그래서 당나라 숙종 이야기는 끼워맞춰진 것이고 작제건의 모계가 진짜 왕건의 뿌리일 가능성이 있다. 작제건의 모계 이야기는 신라의 최고 신분인 성골 장군이 장백산에 오르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장백산은 고려 및 발해의 영토였으니 이 부분을 들어 왕건의 뿌리를 고려와 연결짓는 사람도 있다.
왕건은 고려를 세운 궁예의 신하로 있다가 918년에 궁예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어 궁예가 바꾼 국호를 고려로 되돌렸다. 그리고 궁예가 처음 내세웠던 고려계승을 이어받게 되는데, 이것은 신라와 견훤백제에 맞서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궁예가 처해 있었던 상황과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