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건국하고 이름을 마한이라고 하다
마한(馬韓)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準)註 279이 궁인(宮人)과 좌우(左右)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으로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을 마한(馬韓)註 280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註 281
이와 관련된 내용이≪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30 동이(東夷) 한(韓)조와 ≪후한서(후한書)≫ 권85 동이열전75 삼한조에서 확인된다.
견훤(甄萱)註 282이 태조(太祖)註 283에게 올린 글에 이르기를 “옛날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世)가 일어나자 이에 백제(百濟)가 금마산(金馬山)註 284에서 나라를 창건하였다.”라고 하였다.
현재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익산군 고적조에도 금마산의 이름이 보인다.
최치원(崔致遠)註 285이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麗)요, 진한은 [신]라(羅)이다.”라고 하였다.≪본기(本紀)≫註 286에 의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甲子)년에 일어나고 [고구]려가 그 후 갑신(甲申)년에 일어났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조선]왕 준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東明)[왕]이 일어난 것은 이미 마한을 병합한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구]려를 일컬어 마한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요즘 사람들이 더러는 금마산을 두고 마한이 백제로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대체로 잘못이다. [고구]려 땅에는 본래 [마]읍산(邑山)註 287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마한이라 한 것이다.
신라 하대의 학자로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 한다. 12살에 당(唐)에 유학하여 17살에 과거에 급제했다.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 고병(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 황소를 정벌하는 격문을 지어서 문명을 크게 떨쳤다. 헌강왕(憲康王) 11년(885)에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병부시랑(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다. 진성여왕 8년(894)에 아찬(阿湌)을 지냈으나 곧 사직했으며 만년에 가야산에 숨어 살다 세상을 마쳤다. 저술로는 ≪사육집(四六集)≫과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 있다(장일규, ≪최치원의 사회사상 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註) 280
註) 281
이와 관련된 내용이≪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30 동이(東夷) 한(韓)조와 ≪후한서(후한書)≫ 권85 동이열전75 삼한조에서 확인된다.
註) 284
현재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익산군 고적조에도 금마산의 이름이 보인다.
註) 285
신라 하대의 학자로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 한다. 12살에 당(唐)에 유학하여 17살에 과거에 급제했다.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 고병(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 황소를 정벌하는 격문을 지어서 문명을 크게 떨쳤다. 헌강왕(憲康王) 11년(885)에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병부시랑(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다. 진성여왕 8년(894)에 아찬(阿湌)을 지냈으나 곧 사직했으며 만년에 가야산에 숨어 살다 세상을 마쳤다. 저술로는 ≪사육집(四六集)≫과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이 있다(장일규, ≪최치원의 사회사상 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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