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천책을 세우자 마한이 항의하다
(
6년
07월
)
24년(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註 001을 세우자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 발을 디딜 만한 곳도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註 002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연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 의리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왕이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목책을 헐어버렸다.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 : 온조집단이 마한의 용인 아래 한강유역에 정착하여 국가를 형성하게 된 사정을 반영한 기사이다. 다분히 상징적인 표현이기는 하나, 마한이 백제에게 할양한 ‘100리’의 범위는 『맹자(孟子)』 만장장구(萬章章句) 하편(下篇)에 나오는 천자에게 예속된 제후국의 범위인 ‘사방 백리’와도 통하며,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한조에 나오는 마한 소국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도 볼 수 있다. 백제가 건국된 이후 일정 기간 마한의 영향력 하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진변한조에는 진한의 노인들이 망명하여 왔을 때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주어 진한이 성립되었다는 기사[其耆老傳世自言 古之亡人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가 실려 있는데, 본 기사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註) 002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 : 온조집단이 마한의 용인 아래 한강유역에 정착하여 국가를 형성하게 된 사정을 반영한 기사이다. 다분히 상징적인 표현이기는 하나, 마한이 백제에게 할양한 ‘100리’의 범위는 『맹자(孟子)』 만장장구(萬章章句) 하편(下篇)에 나오는 천자에게 예속된 제후국의 범위인 ‘사방 백리’와도 통하며,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한조에 나오는 마한 소국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도 볼 수 있다. 백제가 건국된 이후 일정 기간 마한의 영향력 하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 진변한조에는 진한의 노인들이 망명하여 왔을 때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주어 진한이 성립되었다는 기사[其耆老傳世自言 古之亡人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가 실려 있는데, 본 기사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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