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왕이 죽다
(
554년
07월
)
32년(554)註 001 가을 7월에 왕이 신라를 습격하려고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註 002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 더불어 싸웠으나 포악한 병사[亂兵]들에게 살해되어 돌아가셨다.註 003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註 004
32년 : 성왕의 재위 기간. 『三國遺事』 권1 王曆에는 21년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난다.
구천(狗川) :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는 위치를 알 수 없는 지명으로 나온다. 현재의 충남 옥천 부근으로 비정된다(李丙燾, 1977, 408쪽). 옥천은 본서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5년(554)조에는 ‘관산성(管山城)’으로, 권43 열전3 金庾信傳 下에는 ‘고리산(古利山)’으로,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5년(554)조에는 ‘함산(函山)’으로 나온다. 구천의 구체적인 위치로는 충북 옥천읍 군서면 월전리 군전부락을 감싸도는 협곡 구진베루(구전벼루)로 비정하는 견해(鄭永鎬, 1976, 55~57쪽; 成周鐸, 1976, 42쪽; 차용걸 외, 2003, 9쪽)와 군북면 이백리의 갯골로 비정하는 견해(管城同好會, 1984, 377~378쪽)가 있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7, 『譯註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管城同好會, 1984, 『沃川鄕誌』.
成周鐸, 1976, 「新羅 三年山城 硏究」, 『百濟硏究』 7.
鄭永鎬, 1976, 「金庾信의 百濟攻擊路硏究」, 『史學志』 6.
차용걸 외, 2003, 『新羅・百濟激戰地(管山城) : 地表調査報告書』, 옥천군・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참고문헌〉
李丙燾, 1977, 『譯註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管城同好會, 1984, 『沃川鄕誌』.
成周鐸, 1976, 「新羅 三年山城 硏究」, 『百濟硏究』 7.
鄭永鎬, 1976, 「金庾信의 百濟攻擊路硏究」, 『史學志』 6.
차용걸 외, 2003, 『新羅・百濟激戰地(管山城) : 地表調査報告書』, 옥천군・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신라의 복병이 … 살해되어 돌아가셨다 : 성왕의 전사는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하류 유역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조에 의하면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관산성에서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이때 신주 군주 김무력이 군사를 이끌고 왔고,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재빨리 공격하여 성왕을 죽였다 한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좌평 4명과 군사 29,600명이 몰살당했다. 이를 전하는 또 다른 기록인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5년(554)조에는 성왕은 신라와의 전쟁을 말리는 기로(耆老)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대를 일으켰다. 왕자 여창은 구타모라새(久陀牟羅塞)를 쌓고 최전방에서 전쟁을 지휘하였다. 이에 성왕은 자식인 여창을 위로하기 위해 가다가 이를 감지한 신라가 길을 차단하여 격파하였다. 성왕은 붙잡혀 고도(苦都)에게 죽었고, 여창도 포위되었으나 활을 잘쏘는 츠쿠시(築紫) 쿠라지노키미(鞍橋君)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하였다. 신라는 성왕의 머리를 북청(北廳) 계단 아래 묻고 나머지 뼈는 백제에 보냈다고 되어 있다. 백제는 한강 하류유역을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신주와 사벌주의 중간인 관산성을 공격하여 허리를 자르는 전략을 취했으나(김병남, 2010, 12~13쪽) 유리한 전황이 옥천 지역 토착세력가의 도움과 신주군 및 중앙군의 가세로(전덕제, 2009, 60~67쪽) 일거에 역전되게 된다. 반면 백제군은 후방에서 구원을 할 성왕이 전사함으로써 고립되어 전세를 만회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정재윤, 2019, 31~33쪽). 이처럼 관산성 전투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 벌어진 일대 회전(會戰)이었으며, 이 싸움에서의 승패는 이후 백제와 신라의 역사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盧重國, 1988, 176~179쪽).
〈참고문헌〉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전덕재, 2009,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新羅文化』 34.
김병남, 2010, 「백제 성왕대 관산성 전투의 의미」, 『全北史學』 36.
정재윤, 2019, 「삼국통일의 전초전 관산성 전투」,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시작 한강유역과 관산성』,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경북문화재단.
〈참고문헌〉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전덕재, 2009,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新羅文化』 34.
김병남, 2010, 「백제 성왕대 관산성 전투의 의미」, 『全北史學』 36.
정재윤, 2019, 「삼국통일의 전초전 관산성 전투」,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시작 한강유역과 관산성』,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경북문화재단.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 시호인 ‘성’은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6년(555)조에는 ‘성명왕(聖明王)’ 또는 ‘성왕(聖王)’으로 표기되어 있어 생전에 ‘성’자를 사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시호로서 ‘성’은 도(道)를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킨 것을 ‘성’이라 한다는 기록에 부합한다는 견해(문동석, 2020, 「백제의 시호제(諡號制)와 시호(諡號)의 함의」, 『百濟學報』 32, 90쪽)도 있다.
註) 001
32년 : 성왕의 재위 기간. 『三國遺事』 권1 王曆에는 21년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난다.
註) 002
구천(狗川) :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는 위치를 알 수 없는 지명으로 나온다. 현재의 충남 옥천 부근으로 비정된다(李丙燾, 1977, 408쪽). 옥천은 본서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5년(554)조에는 ‘관산성(管山城)’으로, 권43 열전3 金庾信傳 下에는 ‘고리산(古利山)’으로,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5년(554)조에는 ‘함산(函山)’으로 나온다. 구천의 구체적인 위치로는 충북 옥천읍 군서면 월전리 군전부락을 감싸도는 협곡 구진베루(구전벼루)로 비정하는 견해(鄭永鎬, 1976, 55~57쪽; 成周鐸, 1976, 42쪽; 차용걸 외, 2003, 9쪽)와 군북면 이백리의 갯골로 비정하는 견해(管城同好會, 1984, 377~378쪽)가 있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7, 『譯註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管城同好會, 1984, 『沃川鄕誌』.
成周鐸, 1976, 「新羅 三年山城 硏究」, 『百濟硏究』 7.
鄭永鎬, 1976, 「金庾信의 百濟攻擊路硏究」, 『史學志』 6.
차용걸 외, 2003, 『新羅・百濟激戰地(管山城) : 地表調査報告書』, 옥천군・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참고문헌〉
李丙燾, 1977, 『譯註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管城同好會, 1984, 『沃川鄕誌』.
成周鐸, 1976, 「新羅 三年山城 硏究」, 『百濟硏究』 7.
鄭永鎬, 1976, 「金庾信의 百濟攻擊路硏究」, 『史學志』 6.
차용걸 외, 2003, 『新羅・百濟激戰地(管山城) : 地表調査報告書』, 옥천군・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註) 003
신라의 복병이 … 살해되어 돌아가셨다 : 성왕의 전사는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하류 유역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조에 의하면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관산성에서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이때 신주 군주 김무력이 군사를 이끌고 왔고,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재빨리 공격하여 성왕을 죽였다 한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좌평 4명과 군사 29,600명이 몰살당했다. 이를 전하는 또 다른 기록인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5년(554)조에는 성왕은 신라와의 전쟁을 말리는 기로(耆老)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대를 일으켰다. 왕자 여창은 구타모라새(久陀牟羅塞)를 쌓고 최전방에서 전쟁을 지휘하였다. 이에 성왕은 자식인 여창을 위로하기 위해 가다가 이를 감지한 신라가 길을 차단하여 격파하였다. 성왕은 붙잡혀 고도(苦都)에게 죽었고, 여창도 포위되었으나 활을 잘쏘는 츠쿠시(築紫) 쿠라지노키미(鞍橋君)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하였다. 신라는 성왕의 머리를 북청(北廳) 계단 아래 묻고 나머지 뼈는 백제에 보냈다고 되어 있다. 백제는 한강 하류유역을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신주와 사벌주의 중간인 관산성을 공격하여 허리를 자르는 전략을 취했으나(김병남, 2010, 12~13쪽) 유리한 전황이 옥천 지역 토착세력가의 도움과 신주군 및 중앙군의 가세로(전덕제, 2009, 60~67쪽) 일거에 역전되게 된다. 반면 백제군은 후방에서 구원을 할 성왕이 전사함으로써 고립되어 전세를 만회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정재윤, 2019, 31~33쪽). 이처럼 관산성 전투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 벌어진 일대 회전(會戰)이었으며, 이 싸움에서의 승패는 이후 백제와 신라의 역사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盧重國, 1988, 176~179쪽).
〈참고문헌〉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전덕재, 2009,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新羅文化』 34.
김병남, 2010, 「백제 성왕대 관산성 전투의 의미」, 『全北史學』 36.
정재윤, 2019, 「삼국통일의 전초전 관산성 전투」,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시작 한강유역과 관산성』,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경북문화재단.
〈참고문헌〉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전덕재, 2009,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新羅文化』 34.
김병남, 2010, 「백제 성왕대 관산성 전투의 의미」, 『全北史學』 36.
정재윤, 2019, 「삼국통일의 전초전 관산성 전투」,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시작 한강유역과 관산성』,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경북문화재단.
註) 004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 시호인 ‘성’은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6년(555)조에는 ‘성명왕(聖明王)’ 또는 ‘성왕(聖王)’으로 표기되어 있어 생전에 ‘성’자를 사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시호로서 ‘성’은 도(道)를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킨 것을 ‘성’이라 한다는 기록에 부합한다는 견해(문동석, 2020, 「백제의 시호제(諡號制)와 시호(諡號)의 함의」, 『百濟學報』 32, 90쪽)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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