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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宗 統和 3년(A.D.985; 高麗 成宗 4) 가을 7월에
○ 聖宗 統和 3년(A.D.985; 高麗 成宗 4) 가을 7월에 모든 道에 詔勅을 내려 武器를 정비하여 동쪽으로 高麗를 정벌하는데 대비하도록 하였다가註 009 8월에 遼나라 진펄이 卑濕한 까닭으로 出兵을 중지하였다.註 010
[統和] 10년(A.D.992; 高麗 成宗 11)에 東京留守 蕭恒德으로 하여금 高麗를 정벌하도록 하였다.註 011
[統和] 11년(A.D.993; 高麗 成宗 12)에 王治가 朴浪柔를 파견하여 表를 올려 罪를 自認하므로 詔勅을 내려 女直國 鴨綠江 동쪽 수백리 땅을 주었다.註 012
註) 009
『遼史』 「聖宗紀」統和 3年條에 ‘詔諸道繕甲兵 以備東征高麗’라 하였다.
≪參考文獻≫
『遼史』卷10 「聖宗紀」1 統和 3年 秋7月 甲辰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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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0
『遼史』 「聖宗紀」統和 3年條에는 ‘以遼澤沮洳 罷征高麗’라 하였다.
≪參考文獻≫
『遼史』卷10 「聖宗紀」1 統和 3年 8月 癸酉條.
金渭顯, 『遼金史硏究』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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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1
『遼史』 「聖宗紀」統和 10年條에 ‘是月 以東京留守蕭恒德等伐高麗’라 하였다. 그러나 契丹軍이 高麗 北鄙에 이르러서 高麗軍과 交兵한 것은 그로부터 한 해 뒤의 일이다. 이에 대한 기사를『高麗史』成宗 12年條에는 ‘辛西京 進次安北府 聞契丹 蕭遜寧攻破蓬山郡 不得進乃還 遣徐熙請和 遜寧罷兵’이라 하였다. 그러나 契丹軍이 高麗 征伐에 나서서 행군한 기간은 10개월이 걸린 셈이다. 그러나『遼史』 「蕭恒德列傳」에는 ‘(統和)六年 …… 時高麗未附 恒德受詔 率兵拔其邊城 三治懼 上表請降’이라 하였다. 이 기사는 本紀와 4年差가 있는데 아마 列傳의 誤記일 것이다.
『遼史』와『高麗史』에서는 契丹將의 이름이 다르게 記錄되어 있다. 즉, 『高麗史』에는 蕭遜寧으로, 『遼史』에는 蕭恒德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遼史』 「蕭恒德列傳」에 ‘恒德 子遜寧 有膽略而善謀 統和元年尙越國公主 拜駙馬都尉 遷南面林牙’라 하였다. 그렇다면『高麗史』에서 遜寧이라 적은 것은 恒德의 字를 적은 것이라 하겠다.
≪參考文獻≫
『高麗史』卷3 「世家」3 成宗 12年 閏10月 丁亥條.
『遼史』卷13 「聖宗紀」4 統和 10年 12月條; 卷88 「蕭恒德列傳」
金渭顯, 『契丹的東北政策』1981;『遼金史硏究』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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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2
이 記事는『遼史』 「聖宗紀」의 內容과는 一致하지만『高麗史』의 內容과는 一致하지 않는다. 統和 11年(993)은 高麗 成宗 12年으로 高麗와 戰爭狀態에서 겨우 和約이 이루어져서 契丹兵이 退脚할 때로서 그것도 閏10月의 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해(994) 2月에 蕭恒德이 高麗에 글을 올려 빨리 安北府에서 鴨淥江 東에 이르는 280里 땅을 踏査하여 築城토록 재촉을 하고 있다.
契丹防禦에 朴良柔는 侍中으로써 上軍使를 맡았었다. 成宗 12年 末에 禮幣使로 契丹에 派遣된다. 그러나 이 記事는『高麗史』에는 없는데, 다만 成宗 13年 4月에 ‘是月 遣侍中朴良柔奉表如契丹 告行正朔 乞還俘口’라는 內容이 傳한다. 統和 11年에는 表를 올린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 記事는 時期와 內容이 맞지 않는 것이다.
위의 記事 中 女直이 나오는데 이는 女眞을 말한다. 10世紀 前後의 東亞諸國 史書中『宋史』및『高麗史』에는 모두 女眞이라 하였고, 『遼史』에만 唯一하게 女直으로 記錄하였다. 이는 다름아닌 避諱에서 나온 것이다.『遼史』 「興宗紀」에 ‘興宗神聖孝章皇帝 諱宗眞 字夷不菫 小字只骨’이라 하였다. 그리고 女眞의 名稱이 史籍에는 903年에 처음 보인다. 이 女眞의 名稱은 ‘朱理眞’이었는데 뒷날 訛傳되어 女眞이 되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로 일컬어졌는데 즉, 女貞·朱理眞·慮眞·朱兒址·朱里先·徹兒赤·朱先 등으로 나온다. 이는 모두 記錄 및 傳聞의 訛誤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 女眞의 種族的 來源에 관해서도 많은 學說이 있다. 그러나 大部分이 肅愼이 挹婁가 되고, 挹婁가 勿吉이 되고, 勿吉이 靺鞨이 되고, 靺鞨이 女眞으로 演變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諸氏의 說을 綜合하여 보면 두가지 異說이 있다. 그 하나는 單一來源說이고, 또 하나는 複合來源說이다. 여기에 두 說을 紹介하면 우선 單一來源說에 대하여는『金史』 「世紀」에는
金之先 出靺鞨氏 靺鞨本號勿吉 勿吉 古肅愼地也 …… 唐初 有黑水靺鞨·粟末靺鞨 …… 五代時 契丹盡取渤海地 而黑水靺鞨附屬于契丹 其在南者籍契丹 號熟女直 其在北者不在契丹籍 號生女直
이라 하였으며, 『三朝北盟會編』에도
女眞 古肅愼國也 …… 本高麗朱蒙之遺 或以爲黑水靺鞨之種而渤海之別族 三韓 辰韓其實皆東夷之小國也
라 하였고, 또『松漠紀聞』에도
女眞卽古肅愼國也 東漢之挹婁 元魏之勿吉 隋唐之靺鞨 其屬分之部 黑水部卽今之女眞
이라 하여 위의 三種史料는 모두 女眞이 黑水靺鞨에서 나왔다고 記錄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女眞은 모두 一種族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三種史料의 記事를 根據로 金毓黻은 女眞이 黑水靺鞨에서 나왔음은 疑心이 없다고 하였다. 그밖에 單一來源說이나 系統을 달리 보는 見解도 있다. 즉, 李學智는 그의 論文 「釋女眞」에서
假若吾人解釋不差 知金代之女眞 非直出於黑水靺鞨 而係出自室韋如者部
라고 主張하였다. 反面에 一部의 學者들은 複合民族說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즉, 稻葉君山은 그의 著書『滿洲發達史』에서
長白山東西地域內 不免容納一二半獨立國之存在 此半獨立國 究爲何等民族乎 則有如被契丹所之渤海國之遺民 及黑水靺鞨之部族等皆是 於是乃有女眞名詞之出現
이라 하여 渤海遺民과 黑水靺鞨之衆으로 보고 있으며, 또 趙振績도 그의 論文 「女眞族系考」에서
女眞族系 據傳統歷史之記載 源之於秦之肅愼 漢魏之挹婁 南北朝之勿吉 隋唐之黑水靺鞨 而爲元明之女眞 衍之爲近代之滿洲族 史實不盡然 …… 女眞族系來源多元如烏古部·高麗·黑水靺鞨
이라 하여 역시 多元說을 主張하고 있다. 筆者도 遼代의 女眞을 單一民族으로 보지 않는다. 한가지를 부연한다면 完顔部 部族을 例로 들어보면 完顔部는 明白히 女眞의 一部다. 完顔氏가 化家爲國하였을 때 모두 女眞이라 稱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先祖는 高麗 또는 新羅에서 遷徙한 것으로 傳하고 있다.『金史』 「世紀」에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年已六十餘矣 兄阿古廼好佛 留高麗不肯從 曰 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 吾不能去也 獨與弟保活里俱 始祖居完顔部僕幹水之涯
라 하였고, 또『高麗史』에도 女眞人 自身이 高麗를 父母之國이라 稱한 記事가 있다. 즉, 『高麗史』睿宗 4年條에
褭弗·史顯等來朝 庚子御宣政殿南門 引見褭弗·史顯等六人 宣門來由 褭弗等奏曰昔我太師盈歌嘗言我祖宗出自大邦 至于子孫義合歸附 今太師烏雅束 亦以大邦爲父母之國
이라 하였다. 뒷날 金 太祖 阿骨打도 阿只에게 보낸 書中에 ‘自我祖考 介在一方 謂契丹 爲大國 高麗 爲父母之邦(『高麗史節要』睿宗文孝大王 12年條)’이라 하였다. 이렇게 보면 明白히 完顔部는 高麗의 遺裔이다. 그렇다면 女眞의 來源이 單一來源일 수는 없다.
그리고 女眞도 여러 갈래였다.『遼史』 「百官志」에 의하면 女直國·北女直國·南女直國·曷蘇館路女直國·長白山女直國·鴨綠江女直國·瀕海女直國 등이 있다.
≪參考文獻≫
『高麗史』卷3 「世家」3 成宗 13年 4月條; 卷13 「世家」13 睿宗 4年 6月條.
『高麗史節要』권8 睿宗文孝大王 12年 3月條.
『遼史』卷18 「興宗紀」1; 卷46 「百官志」2.
『金史』卷1 「世紀」
『三朝北盟會編』卷3 重和 2年 正月條.
金渭顯, 『契丹的東北政策』1981;『遼金史硏究』1985.
洪 皓, 『松漠紀聞』1968, 廣文書局, 臺北.
趙振績, 「女眞族系考」『中國歷史學會史學集刊』第 7 期, 1975.
陶晋生, 『中國近古史』1979, 東華書局, 臺北.
李學智, 「釋女眞」『大陸雜誌』第 1 輯 5册.
稻葉君山, 『滿洲發達史』1969, 大信印書館, 臺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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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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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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