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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과 백암성에서 돌궐에게 승리하다 ( 551년 09월 )
〔7년(551)〕 가을 9월에 돌궐(突厥)註 001이 와서 신성(新城)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고, 백암성(白巖城)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高紇)을 보내 병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막게 하여 이기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註 002
註) 001
돌궐(突厥) : 고대 투르크어인 ‘투르크(Türk 또는 Türük)’의 음사로 추정된다. 원래 유연(柔然)에 복속되어 철 제련에 종사하면서 금산(金山,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웅거하고 있었으나, 아사나(阿史那) 씨족의 족장이면서 돌궐 부족의 군장이었던 토문(土門)이 550년 철륵(鐵勒), 552년에는 유연마저 격파하고 스스로 이리가한(伊利可汗, 552~553)이라 칭하면서 북방 유목세력으로 대두되었는데, 동으로 다싱안링산맥[大興安嶺山脈]부터 우즈베키스탄 초원지대가 있는 톈먼[鐵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돌궐은 북조에 대해 북제와 북주 간 대립을 이용해 실익을 취하면서 유리한 위치에 서 있었지만, 이어서 등장한 수(隋)는 돌궐에 대해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고 압박을 가하였다. 이에 돌궐은 북제 부흥세력이었던 고보령(高寶寧)과 연합을 맺어 582년과 583년에 수를 공격하였는데 패배하였다. 이후 돌궐 내부 분열을 이용한 수의 이간책으로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의 동돌궐과 달두가한(達頭可汗)의 서돌궐로 분열되었는데, 동돌궐은 아파가한(阿波可汗)과 연합한 서돌궐의 공격을 받자 그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585년 수에 신속하였다. 이후에도 계속 대립구도를 형성한 동돌궐과 서돌궐은 당(唐)에 의해 각각 630년, 647년에 멸망하였다. 680년대에 들어서 쿠틀룩이 빌게 톤유쿠크와 함께 세력을 결집하여 과거 유목제국의 수도인 외튀켄(Ötüken)이 있는 몽골초원을 차지하고 힐질리시사한(詰跌利施可汗)으로 등극하면서 돌궐은 부흥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계승문제를 둘러싼 지배층의 분열 속에서 745년에 위구르 등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에도 돌궐 잔존세력이 여러 차례 세력을 결집하여 부흥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를 보면 돌궐의 목한가한(木汗可汗, 553~572)이 요해(遼海) 이서까지 진출하여 거란(契丹), 실위(室韋), 고막해(庫莫奚) 등 여러 종족에 영향력을 미치면서 마찰을 빚은 바 있다. 또 신성(新城)과 백암성(白巖城)에서 전투를 벌였고, 고구려·말갈과 돌궐의 이계찰(利稽察) 세력 간에 충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수를 견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돌궐과의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동북아역사재단, 2010, 『周書·隋書 外國傳 譯註』, 동북아역사재단
정재훈, 2017, 『돌궐유목제국사』, 사계절
이재성, 2018, 『고구려와 유목 민족의 관계사 연구』, 소나무
이재성, 2005, 「6세기 후반 突厥의 南進과 高句麗와의 충돌」, 『북방사논총』 5
임기환, 2006 「7세기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전쟁」, 『전쟁과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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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2
돌궐이 와서 ……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 고구려와 돌궐의 최초 조우를 보여주는 기사로, 본서에만 있고 중국 사서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독자전승에 의거해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기사 및 기년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돌궐이 유연을 멸망시키고 잔여세력마저 토벌한 시기가 각각 552년과 555년이고, 552년 초에 허베이성[河北省] 북단 장성 부근 회황진(懷荒鎭)에서 유연을 격파하였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551년 당시에는 아직 유연이 건재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이 유연이 건재한 상황에서 고구려와 돌궐이 충돌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 속에서 551년이 아닌 551년에서 가까운 시점(노태돈, 402-403·537쪽) 혹은 유연이 완전히 멸망한 555년 이후(이재성, 115쪽; 임기환, 59-60쪽)에 양 세력 간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고 보기도 하고, 연대의 착오 속에서 군사적 충돌이 아닌 교섭을 보여주는 기사라고 보기도 하며(李龍範, 44쪽), 아예 기사 자체를 허구로 간주하기도 한다(津田左右吉). 이에 반해 547년에 있었던 백암성(白巖城)과 신성(新城) 수리가 돌궐 침입에 대비해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고(閔喆熙, 71-73쪽), 551년 이전부터 돌궐이 철륵(鐵勒)을 무너뜨리고 서위(西魏)와 혼인 관계를 맺는 등 강력한 세력으로 대두하였으며(정동민, 260쪽), 북위가 내부 혼란으로 회황진 등 육진을 통제하지 못하는 당시 상황에서 유목민으로서 기동력이 우수하였던 돌궐이 요서(遼西)를 지나 고구려 서북변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강선, 98쪽) 기년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2014,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李龍範, 1959, 「高句麗의 遼西 進出 企圖와 突厥」, 『史學硏究』 4
閔喆熙, 2002, 「高句麗 陽原王ㆍ平原王代의 政局變化」, 『史學志』 35
강선, 2005, 「4~6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고구려의 대외정책」, 『軍史』 54
이재성, 2005, 「6세기 후반 突厥의 南進과 高句麗와의 충돌」, 『북방사논총』 5
임기환, 2006, 「7세기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전쟁」, 『전쟁과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 일조각
정동민, 2019, 「고대 동아시아의 接境, 遼西-중국왕조, 유목세력, 고구려의 관계를 중심으로-」, 『중앙사론』 50
津田左右吉, 1922, 「三国史記高句麗本紀の批判」, 『滿鮮地理歷史報告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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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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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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