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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다 ( 657년 01월 )
17년(657) 봄 정월에 왕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각각 식읍(食邑)註 001을 내려주었다.註 002
註) 001
식읍(食邑) : 중국과 한국의 역대 왕조에서 왕족・공신(功臣)・봉작자 등에게 준 일정한 지역을 가리키며, 식봉(食封)이라고도 한다. 중국 周나라의 봉건제도 아래서 왕족과 공신에게 분봉하던 봉토(封土)에 기원을 둔 것으로서, 식읍으로 지급된 지역의 토지는 원래 국가나 왕실이 보유한 것이지만, 귀족이나 관리들이 국가로부터 수취권을 위임받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단 사유지적 성격을 갖는다. 대개 뛰어난 훈공이 있는 왕족이나 척신・공신 등 공로를 세운 고위 귀족들에게 경제적 반대급부로서 지급한 일종의 경제적 특혜라 할 수 있다. 식읍의 지배형태는 일정한 지역을 내려주는 방식과 일정한 봉호(封戶)를 지정해주는 방식으로 나뉘는데, 해당 지역민을 대상으로 전제(租)・공물세(調)・역역(力役)의 부세를 직접 지배하고 수취하는 형태였으며, 원칙적으로 세습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특별한 경우에 세습되기도 하였기에 고위 귀족들의 대토지 사유화의 한 수단으로도 활용되기도 하였다(姜晉哲, 1979, 1166~1167쪽; 李景植, 1988; 노중국, 2000, 65~97쪽; 양기석, 2005, 6~29쪽). 백제의 경우 「흑치상지 묘지명(黑齒常之 墓誌銘)」에서 흑치상지의 조상이 흑치지역에 봉해져서 흑치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는 기록(유원재, 1999, 2~5쪽), 계백(階伯)의 조상이 개백현(皆伯縣)을 근거로 했기 때문이라는 추론(노중국, 2000, 65~97쪽) 등에 비추어 식읍을 이해하기도 한다. 중국 사서인 『南齊書』 권58 百濟傳에 나오는 ‘매라왕(邁羅王)’, ‘벽중왕(辟中王)’ 등의 작호를 식읍과 관련짓기도 하지만, 왕후호(王侯號)를 식읍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참고문헌〉
양기석, 2005, 『백제의 경제생활』, 주류성.
姜晉哲, 1979, 「韓國土地制度史(上)」, 『韓國文化史大系』 Ⅱ,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李景植, 1988, 「古代・中世의 食邑制의 構造와 展開」, 『孫寶基博士停年紀念韓國史論叢』, 知識産業社.
유원재, 1999, 「百濟 黑齒氏의 黑齒에 대한 檢討」, 『百濟文化』 28,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노중국, 2000, 「百濟의 食邑制에 대한 일고찰」, 『慶北史學』 23, 경희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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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2
왕의 서자 41명을 … 식읍을 내려주었다 : 이를 의자왕이 왕족 중심 친위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취한 조치로 보기도 한다. 이것이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6좌평제의 좌평 정원을 크게 벗어난 것이므로 좌평제 정원 철폐 및 지위 하락을 초래하는 정치적 선택인 동시에 국가의 공적 소유물 분배를 통한 사적 권력 기반 확충으로 해석할 수 있다(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210쪽). 의자왕의 아들에 대해서는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660)조에 13인으로 적혀 있어 그 숫자가 다른 부분이 있으며, 이름은 각종 기록을 통해 효(孝)・태(泰)・융(隆)・연(演) 및 강신(康信) 등을 확인할 수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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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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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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