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 한솔 연문진을 사절로 파견하다
(
607년
03월
)
8년 봄 3월에 한솔(扞率) 연문진(燕文進)註 001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또 좌평(佐平) 왕효린(王孝隣)註 002을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고구려를 칠 것을 요청하였다. 양제(煬帝)註 003가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의 움직임을 엿보게 하였다.註 004
왕효린(王孝隣) : 백제 무왕대의 귀족으로 좌평의 지위에 있었다.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구려를 칠 것을 요청하였다. 왕씨(王氏)는 왕효린이 좌평의 관등에 오르고, 장사(長史) 왕변나(王辯那)가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있는 것(598년, 위덕왕 45)에서 볼 때 비록 『隋書』 권81 百濟傳에 나오는 대성팔족에는 들지 못하였지만, 위덕왕과 무왕대에 대중관계가 중요해지면서 중국어와 중국 사정에 정통한 것을 기반으로 급격히 성장한 세력이 아닐까 한다.
양제가 … 고구려의 움직임을 엿보게 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隋書』 권81 百濟傳에 보이는데, 이 기사에 이어 “그러나 장은 내심 고구려와 화친하는 것이어서 속일 마음을 가지고 중국을 엿본 것이다(然璋內與高麗通和 挾詐以窺中國)”가 추가되어 있다. 『隋書』의 이 구절은 무왕의 이중외교를 보여주는 것으로 언급되어왔다. 이 시기 무왕의 대외관계의 초점은 신라에 대한 공격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고구려를 견제함과 동시에 고구려가 신라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필요에서 무왕은 대수외교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면서 한편으로는 고구려와의 연결을 도모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접근을 차단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백제는 수나라와 고구려의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정책을 취하였는데, 이를 실지양단(實持兩端) 외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盧重國, 1981, 91쪽; 김선욱, 1984; 金壽泰, 1991; 김주성, 1998; 여호규, 2002, 29~30쪽). 그러나 이와는 달리 ‘양단정책’은 수나라의 주장일 뿐 백제와 고구려가 연화(連和)했다는 적극적인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주장도 있다(李昊榮, 1982; 박윤선, 2006,103~105쪽). 이 일이 있은 후 곧바로 고구려가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후자로 볼 수도 있다.
〈참고문헌〉
盧重國, 1981, 「高句麗・百濟・新羅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 『東方學志』 28.
李昊榮, 1982, 「麗・濟 連和說의 檢討」, 『慶熙史學』 9・10.
김선욱, 1984, 「백제의 隋唐關係小考」, 『百濟硏究』 15.
金壽泰, 1991, 「百濟의 滅亡과 唐」, 『百濟硏究』 22.
김주성, 1998, 「백제 무왕의 치적」, 『百濟文化』 27.
여호규, 2002, 「6세기말~7세기초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 『역사와 현실』 46.
박윤선, 2006, 「5세기 중반~7세기 백제의 대외관계」, 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참고문헌〉
盧重國, 1981, 「高句麗・百濟・新羅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 『東方學志』 28.
李昊榮, 1982, 「麗・濟 連和說의 檢討」, 『慶熙史學』 9・10.
김선욱, 1984, 「백제의 隋唐關係小考」, 『百濟硏究』 15.
金壽泰, 1991, 「百濟의 滅亡과 唐」, 『百濟硏究』 22.
김주성, 1998, 「백제 무왕의 치적」, 『百濟文化』 27.
여호규, 2002, 「6세기말~7세기초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 『역사와 현실』 46.
박윤선, 2006, 「5세기 중반~7세기 백제의 대외관계」, 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註) 001
註) 002
왕효린(王孝隣) : 백제 무왕대의 귀족으로 좌평의 지위에 있었다.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구려를 칠 것을 요청하였다. 왕씨(王氏)는 왕효린이 좌평의 관등에 오르고, 장사(長史) 왕변나(王辯那)가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있는 것(598년, 위덕왕 45)에서 볼 때 비록 『隋書』 권81 百濟傳에 나오는 대성팔족에는 들지 못하였지만, 위덕왕과 무왕대에 대중관계가 중요해지면서 중국어와 중국 사정에 정통한 것을 기반으로 급격히 성장한 세력이 아닐까 한다.
註) 003
註) 004
양제가 … 고구려의 움직임을 엿보게 하였다 : 동일한 내용이 『隋書』 권81 百濟傳에 보이는데, 이 기사에 이어 “그러나 장은 내심 고구려와 화친하는 것이어서 속일 마음을 가지고 중국을 엿본 것이다(然璋內與高麗通和 挾詐以窺中國)”가 추가되어 있다. 『隋書』의 이 구절은 무왕의 이중외교를 보여주는 것으로 언급되어왔다. 이 시기 무왕의 대외관계의 초점은 신라에 대한 공격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고구려를 견제함과 동시에 고구려가 신라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필요에서 무왕은 대수외교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면서 한편으로는 고구려와의 연결을 도모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접근을 차단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백제는 수나라와 고구려의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정책을 취하였는데, 이를 실지양단(實持兩端) 외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盧重國, 1981, 91쪽; 김선욱, 1984; 金壽泰, 1991; 김주성, 1998; 여호규, 2002, 29~30쪽). 그러나 이와는 달리 ‘양단정책’은 수나라의 주장일 뿐 백제와 고구려가 연화(連和)했다는 적극적인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주장도 있다(李昊榮, 1982; 박윤선, 2006,103~105쪽). 이 일이 있은 후 곧바로 고구려가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후자로 볼 수도 있다.
〈참고문헌〉
盧重國, 1981, 「高句麗・百濟・新羅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 『東方學志』 28.
李昊榮, 1982, 「麗・濟 連和說의 檢討」, 『慶熙史學』 9・10.
김선욱, 1984, 「백제의 隋唐關係小考」, 『百濟硏究』 15.
金壽泰, 1991, 「百濟의 滅亡과 唐」, 『百濟硏究』 22.
김주성, 1998, 「백제 무왕의 치적」, 『百濟文化』 27.
여호규, 2002, 「6세기말~7세기초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 『역사와 현실』 46.
박윤선, 2006, 「5세기 중반~7세기 백제의 대외관계」, 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참고문헌〉
盧重國, 1981, 「高句麗・百濟・新羅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 『東方學志』 28.
李昊榮, 1982, 「麗・濟 連和說의 檢討」, 『慶熙史學』 9・10.
김선욱, 1984, 「백제의 隋唐關係小考」, 『百濟硏究』 15.
金壽泰, 1991, 「百濟의 滅亡과 唐」, 『百濟硏究』 22.
김주성, 1998, 「백제 무왕의 치적」, 『百濟文化』 27.
여호규, 2002, 「6세기말~7세기초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 『역사와 현실』 46.
박윤선, 2006, 「5세기 중반~7세기 백제의 대외관계」, 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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