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죽으니 동명성왕이라 부르다
(
기원전
19년
09월
)
〔19년(B.C. 19)〕 가을 9월에 왕이 돌아가시니[升遐]註 001 이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註 002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불렀다.
왕이 돌아가시니[升遐] : 본문에서는 인간의 죽음과 별반 다를 바 없이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추모왕, 즉 주몽이 왕위[世位]를 즐기지 않자 하늘이 황룡을 보내어 그것을 타고 승천하였다고 나온다. 또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도 왕이 하늘에 올라 내려오지 않았기에 태자 유리가 옥채찍[玉鞭]을 대신 묻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고구려인들이 시조 주몽을 하늘과 혈연적으로 연결된 신적 존재로 여겼기에 나타난 전승이다. 참고로 유교적 원칙론에 따르자면 천자의 죽음을 ‘승하(升遐)’·‘승하(昇遐)’ 및 ‘등하(登遐)’라 한다. 본서 권29 연표상(年表上)에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용산(龍山) :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찬자도 구체적인 위치를 알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주몽의 장지에 대한 기록은 다른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의 경우 주몽이 남긴 옥채찍을 용산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본문과 같은 장지이다. 다음으로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주몽은 홀본 동쪽 언덕[忽本東岡]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승천하였다. 이상의 사료들 모두 용이 나타나든가 용산이라는 지명이 언급되는 것이 공통되므로, 동일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하겠다. 홀본, 즉 졸본은 오늘날의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일대로 여겨지므로, 그 동쪽 언덕 지역이 주몽의 전승 장지가 될 것이다. 고력묘자촌 동쪽의 산지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형세이다. 그렇기에 고구려인들은 그 모습이 용의 형상과 비슷하다고 여겨 용산 내지 용강(龍岡)이라 하였고, 아울러 주몽이 용을 매개로 승천하였다는 전승도 생겼던 것이 아닐까 한다(姜辰垣, 2015, 「高句麗 國家祭祀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76~78쪽).
註) 001
왕이 돌아가시니[升遐] : 본문에서는 인간의 죽음과 별반 다를 바 없이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추모왕, 즉 주몽이 왕위[世位]를 즐기지 않자 하늘이 황룡을 보내어 그것을 타고 승천하였다고 나온다. 또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도 왕이 하늘에 올라 내려오지 않았기에 태자 유리가 옥채찍[玉鞭]을 대신 묻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고구려인들이 시조 주몽을 하늘과 혈연적으로 연결된 신적 존재로 여겼기에 나타난 전승이다. 참고로 유교적 원칙론에 따르자면 천자의 죽음을 ‘승하(升遐)’·‘승하(昇遐)’ 및 ‘등하(登遐)’라 한다. 본서 권29 연표상(年表上)에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註) 002
용산(龍山) :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찬자도 구체적인 위치를 알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주몽의 장지에 대한 기록은 다른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의 경우 주몽이 남긴 옥채찍을 용산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본문과 같은 장지이다. 다음으로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주몽은 홀본 동쪽 언덕[忽本東岡]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승천하였다. 이상의 사료들 모두 용이 나타나든가 용산이라는 지명이 언급되는 것이 공통되므로, 동일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하겠다. 홀본, 즉 졸본은 오늘날의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일대로 여겨지므로, 그 동쪽 언덕 지역이 주몽의 전승 장지가 될 것이다. 고력묘자촌 동쪽의 산지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형세이다. 그렇기에 고구려인들은 그 모습이 용의 형상과 비슷하다고 여겨 용산 내지 용강(龍岡)이라 하였고, 아울러 주몽이 용을 매개로 승천하였다는 전승도 생겼던 것이 아닐까 한다(姜辰垣, 2015, 「高句麗 國家祭祀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76~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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