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진이 남적의 반란을 진압하다
이듬해[신종(神宗) 6년(1203)] 김척후(金陟侯)에게 자신의 말을 타고 개경(開京)으로 돌아오게 하고 정언진(丁彦眞)을 보내어 대체하였다. 대성(臺省)에서 탄핵하여 김척후를 직책에서 파면하였다. 적들이 기양현(基陽縣)으로 침입하자, 최광의(崔匡義)가 군대를 이끌고 급습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들이 매우 많았다. 최충헌(崔忠獻)이 왕에게 아뢰어 중사(中使)를 보내 조서(詔書)와 약을 하사하여 그를 격려하였다. 정언진은 도착하여 환난을 없애는 기도를 한다며 성황사(城隍祠)로 가서 무당에게 은밀히 적을 잡을 방법을 알려주었다. 어느 날 적도(賊徒)인 도령(都領) 이비(利備) 부자가 사당으로 와서 몰래 기도를 드리자, 무당이 속이며 말하기를, “도령께서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新羅)를 부흥시키려 하니 저희들이 기뻐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다행히 뵙게 되었으니 청컨대 술 한 잔을 올리고 싶습니다.”라고 하며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서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는 정언진에게 압송하였다.
적들이 기계현(杞溪縣)을 노략질하자 이유성(李維城)이 군대를 진격시켜 공격하니 적의 우두머리 패좌(孛佐)가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살펴보고는 도망하려 하였다. 장군(將軍) 방수정(房秀精)이 두 아들을 데리고 먼저 올라 힘을 다해 공격하자, 사졸(士卒)들도 그 틈을 타 〈적의 머리〉 1,000여 급(級)을 베고 250여 명을 사로잡았다. 정언진이 또 대정(隊正) 함연수(咸延壽)와 강숙청(康淑淸)을 운문산(雲門山)에 보내어 패좌에게 안심하고 본업으로 돌아가라고 달래었지만 듣지 않았다. 적의 부두목이 여러 차례 함연수에게 눈짓을 하니, 함연수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밖으로 나가 칼을 가지고 들어와 패좌를 쳤다. 패좌가 벌떡 일어났으나, 강숙청이 쳐서 죽이고는 그 머리를 개경(開京)으로 보냈다. 적의 부하들이 함연수 등을 찌르려고 하였으나 적의 부두목이 꾸짖으며 말려서 죽음을 면하였다. 최광의가 태백산(太白山)의 적 우두머리인 아지(阿之)를 잡아 형틀을 채워 개경으로 압송하려는데 옥중에서 굶어 죽었다. 최광의가 다시 아뢰기를, “흥주(興州)의 부석사(浮石寺)와 부인사(符仁寺) 및 송생현(松生縣)의 쌍암사(雙岩寺) 등의 승도(僧徒)들이 반란을 도모합니다.”라고 하니, 병마사에게 그들을 국문(鞫問)하게 하고 섬으로 유배시켰다. 또 이듬해에 최충헌이, 최광의·이이·강순의·이유성 등이 동경(東京)을 평정한 공이 가장 크다 하여, 왕에게 아뢰어 먼저 돌아오게 하여 작위와 봉록을 올려주었으며 막료(幕僚)들에게도 상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정언진과 전원균(田元均) 등이 돌아오자 최충헌이 아뢰기를, “적들이 아직 다 제거되지 않았으니 중군판관(中軍判官) 박인석(朴仁碩)을 안찰사(按察使)로 삼아 체류시키고 경군(京軍) 200명을 거느리고 진압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박인석이 잔당 김순(金順) 등 20여 인을 사로잡고, 황보경(皇甫經)을 보내 보고하니, 왕이 황보경을 내시(內侍)에 소속시키고 8품직으로 올려주었다. 고종(高宗) 2년(1215) 정언진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지내다가 죽었다.
적들이 기계현(杞溪縣)을 노략질하자 이유성(李維城)이 군대를 진격시켜 공격하니 적의 우두머리 패좌(孛佐)가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살펴보고는 도망하려 하였다. 장군(將軍) 방수정(房秀精)이 두 아들을 데리고 먼저 올라 힘을 다해 공격하자, 사졸(士卒)들도 그 틈을 타 〈적의 머리〉 1,000여 급(級)을 베고 250여 명을 사로잡았다. 정언진이 또 대정(隊正) 함연수(咸延壽)와 강숙청(康淑淸)을 운문산(雲門山)에 보내어 패좌에게 안심하고 본업으로 돌아가라고 달래었지만 듣지 않았다. 적의 부두목이 여러 차례 함연수에게 눈짓을 하니, 함연수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밖으로 나가 칼을 가지고 들어와 패좌를 쳤다. 패좌가 벌떡 일어났으나, 강숙청이 쳐서 죽이고는 그 머리를 개경(開京)으로 보냈다. 적의 부하들이 함연수 등을 찌르려고 하였으나 적의 부두목이 꾸짖으며 말려서 죽음을 면하였다. 최광의가 태백산(太白山)의 적 우두머리인 아지(阿之)를 잡아 형틀을 채워 개경으로 압송하려는데 옥중에서 굶어 죽었다. 최광의가 다시 아뢰기를, “흥주(興州)의 부석사(浮石寺)와 부인사(符仁寺) 및 송생현(松生縣)의 쌍암사(雙岩寺) 등의 승도(僧徒)들이 반란을 도모합니다.”라고 하니, 병마사에게 그들을 국문(鞫問)하게 하고 섬으로 유배시켰다. 또 이듬해에 최충헌이, 최광의·이이·강순의·이유성 등이 동경(東京)을 평정한 공이 가장 크다 하여, 왕에게 아뢰어 먼저 돌아오게 하여 작위와 봉록을 올려주었으며 막료(幕僚)들에게도 상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정언진과 전원균(田元均) 등이 돌아오자 최충헌이 아뢰기를, “적들이 아직 다 제거되지 않았으니 중군판관(中軍判官) 박인석(朴仁碩)을 안찰사(按察使)로 삼아 체류시키고 경군(京軍) 200명을 거느리고 진압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박인석이 잔당 김순(金順) 등 20여 인을 사로잡고, 황보경(皇甫經)을 보내 보고하니, 왕이 황보경을 내시(內侍)에 소속시키고 8품직으로 올려주었다. 고종(高宗) 2년(1215) 정언진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지내다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