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志(289)
漢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고구려령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서 조복과 의책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 溝漊者句麗名城也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라 부른다. 구루란 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
http://qindex.info/i.php?x=15034
  三國志(289) -0075
한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고구려령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서 조복과 의책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x=17034
  三國志(289) -0075
▐ 현도군에 와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다거나 현도군의 동쪽에 경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현도군이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겨간 이후의 상황에 어울린다. 현도군에 고구려령이 있어 찾아온 고구려인들에게 조복과 의책을 주는 일을 관장하였다는 이야기는 고구려현이 고구려가 아닌 현도군 치소에 있었고 고구려를 실질적으로 통치하지는 못했다는 뜻이 된다.
http://qindex.info/i.php?x=17120
 0289 三國志
漢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고구려령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서 조복과 의책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 溝漊者句麗名城也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라 부른다. 구루란 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
http://qindex.info/i.php?x=150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