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1 고려사
서경유수관 평양부는 본래 3조선의 옛 도읍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이 단목 아래로 내려오니 국인이 그를 임금으로 옹립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아 단군이라 부르니 이것이 전조선이 되었다. 周나라 무왕이 商나라를 정벌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니, 이것이 후조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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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1 고려사
41대 후손 준에 이르러 燕나라 사람 위만이 무리 1,000여명을 모아 망명해 와서 준의 땅을 빼앗아 王險城(險은 儉으로도 쓰고, 곧 평양이다.)을 도읍으로 하니, 이것이 위만조선이 되었다. 그의 손자 우거가 황제의 명령을 받들지 않자, 漢나라 무제가 원봉 2년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고 사군을 정하면서 왕험을 낙랑군으로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 15년에 국내성에서 옮겨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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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1 고려사
동명왕묘가 있다. 부의 동남쪽 중화현 경계의 용산(龍山)에 있으며, 민간에서는 진주묘라고 부른다. 또 인리방에 사우가 있는데, 고려 때에 어압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초하루와 보름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지금까지 일이 있으면 자주 소원을 빈다. 세상에 전하기를 동명성제의 사당이라 한다. 을밀대가 있다. 대는 금수산 정상에 있으며, 대의 아래층의 절벽 가까이에 영명사가 있는데, 곧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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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1 고려사
동명왕묘가 있다. 부의 동남쪽 중화현 경계의 용산(龍山)에 있으며, 민간에서는 진주묘라고 부른다. 또 인리방에 사우가 있는데, 고려 때에 어압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초하루와 보름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지금까지 일이 있으면 자주 소원을 빈다. 세상에 전하기를 동명성제의 사당이라 한다. 을밀대가 있다. 대는 금수산 정상에 있으며, 대의 아래층의 절벽 가까이에 영명사가 있는데, 곧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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