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 後漢書(445)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므로 광무제가 후하게 보답하니 이에 사절이 해마다 왕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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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11 後漢書(445)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거느리고 낙랑을 노략질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으나 그 뒤에 다시 귀부하였다. -- 낙랑은 현도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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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20 後漢書(445)
(부여가) 사자(세자) 위구태를 보내어 궁궐에 나아와서 조공을 바치므로 천자가 위구태에게 인수와 금채를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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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20 後漢書(445)
乃遣嗣子尉仇台闕貢獻 天子賜尉仇台印綬金綵 부여가 사자 위구태를 보내어 궁궐에 나아와 조공을 바치므로 천자가 위구태에게 인수와 금채를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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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36 後漢書(445)
부여왕이 경사에 와서 조회하므로 제(帝)는 황문고취(악단연주)와 각저희(씨름)를 하게 하여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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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36 後漢書(445)
부여왕이 경사에 와서 조회하므로 제(帝)는 황문고취(악단연주)와 각저희(씨름)를 하게 하여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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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사편찬위원회
光武帝紀에는 樂浪을 塞로만 기술하고 있어 樂浪을 玄菟의 잘못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李丙燾) 이를 樂浪郡의 遼東說의 중요한 근거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리지린 고조선연구) 이는 後漢의 쇠퇴와 高句麗·百濟의 흥기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遼東지역에 후퇴한 樂浪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된다. 한편 始를 夫餘王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千寬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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