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1 後漢書(445)
여름에 다시 요동의 선비 8천여명과 함께 요수을 침공하여 관리와 민간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채풍 등이 신창에서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공조인 경모와 병조연인 용서와 병마연인 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가리다가 모두 진중에서 죽으니 죽은 사람이 백여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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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21 後漢書(445)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마한·예맥의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그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2만여명을 거느리고 유주·현도군과 함께 힘을 합하여 쳐서 깨뜨리고 5백여명을 참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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