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18 「三國誤記」 百濟
비류는 그 백성을 나누어 彌鄒忽로 돌아가 살았고 온조는 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十濟라 하였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어서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
그 후 백성들이 즐거이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百濟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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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5 三國史記 (4) 仇台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나라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 구태가 백제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주서(636), 수서(636), 북사(659), 통전(801) 그리고 책부원구(1013)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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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百濟本紀 01
百濟始祖温祚王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弟二女妻之 未幾扶餘王薨 朱蒙嗣位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 아버지가 추모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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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百濟本紀 02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 둘째 아들은 온조라고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서 월군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마려 등 10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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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百濟本紀 03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건대 이곳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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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百濟本紀 05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으로 돌아와서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하고 태평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 그 후 올 때 백성들이 즐거이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함께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씨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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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百濟本紀 06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觧扶婁庻孫 母召西奴 卒夲人延陁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温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가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다.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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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百濟本紀 07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으며,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왕업을 세우는 데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은 소서노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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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百濟本紀 08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난 아들 유류가 오자 태자가 되고 왕위를 잇게 되었다. 이에 비류가 온조에게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 도망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쏟아 나라를 세우는 것을 많이 도와 주었다. 대왕께서 돌아가시고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여기서 쓸모없이 지내는 것보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낫겠다.’라며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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