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9 단군사당
▐ 단군 이야기는 왕씨고려 때부터 기록에 등장하지만 왕조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은 이씨왕조부터다. 1392년부터 기자와 함께 단군을 국조로 모셔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1412년부터 평양성 안에 있는 기자 사당에 단군 신위를 함께 모시고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425년에는 단군 사당을 따로 건립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1429년에 기자 사당 남쪽에 따로 사당을 만들어 동쪽에는 동명을 모시고 서쪽에는 단군을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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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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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기자묘가 부성 북쪽 토산 위에 있는데, 정자각·석인·석양이 모두 남쪽을 향하였으며, 사당은 성안 의리방에 있다.【봄·가을에 향축을 전하여 제사를 지낸다. 금상(세종) 12년 경술에 유사에 전지하기를, “예전에 무왕이 은(殷)나라를 이기고, 은나라 태사를 우리 나라에 봉한 것과 그가 신하노릇하지 아니할 뜻을 이루게 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문물 예악이 중국과 같은 것은 오직 기자의 가르침에 힘입은 까닭이니, 비석을 사당에 세우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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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단군 사당(檀君祠堂)은 기자의 사당 남쪽에 있고,【금상(今上) 11년 기유에 비로소 사당을 세우고 고구려 시조 동명왕(東明王)을 합사(合祠)하였는데, 단군이 서쪽에, 동명이 동쪽에 있게 하여 모두 남향하게 하였다. 봄·가을마다 향축(香祝)을 내리어 제사를 지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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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동명왕묘가 부(府) 동남쪽 30리 되는 중화 용산에 있다.【화반석으로 광(壙)을 영조하였다. 진주묘라 한다. 이승휴가 기록하기를, “하늘에 올라서 다시 운병에 돌아오지 않고 장사지내는 데 옥편을 더하여 무덤을 이루었다.” 한 것은 곧 이것이다. 인리방에 사당이 있는데 고려에서 때로 어압을 내려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보름에도 또한 소재관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였다. 읍인들이 지금도 일이 있으면 문득 비는데 고로들이 전하기를 동명성제의 사당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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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옆에 영명사가 있으니, 곧 동명왕의 구제궁이다. 안에 기린을 기르던 굴이 있는데, 후인이 비석을 세워서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굴 남쪽 백은탄에 바위가 있는데, 밀물에는 묻히고 썰물에는 드러난다. 이름을 조천석이라 한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동명왕이 기린을 타고 굴 속에서 나와 조천석에 올라서 천상에 주사하였다.” 한다. 이승휴가 이르기를, “천상을 오가며 천정에 나아가니, 조천석 위에 기린이 날쌔도다.”한 것은 곧 이를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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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4_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 여기서의 동명은 부여의 시조가 아니라 고려의 시조 추모를 말한다. ▐ 추모왕 때는 평양이 낙랑군이었다. 따라서 평양에 있는 추모왕릉은 평양천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추모가 평양에서 기린을 길렀다는 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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