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91 史記 宋微子世家
▐ 尙書에는 箕子가 朝鮮으로 달아나자 朝鮮에 봉했다고 되어 있으나 史記에는 箕子를 방문하여 鴻範九等을 듣고 난 후 朝鮮에 봉했다고 되어 있다.
-1046년경에는 周의 영향력이 대동강은 물론 요하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尙書의 이야기가 더 자연스럽다.
또 箕子로부터 鴻範九等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尙書에 없던 것인데, 箕子가 달아났다는 이야기와 모순되기 때문에 史記에서는 箕子를 방문했다는 이야기로 바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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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91 史記 宋微子世家
▐ 殷 帝乙의 큰아들이자 紂王의 배다른 형인 微子 開는 紂王에게 여러 차례 간하다 듣지 않자 떠났다.
紂王의 친척인 箕子도 紂王에게 여러 차례 간하다 듣지 않자 미친 척하며 노예가 되었다.
역시 紂王의 친척인 比干도 箕子가 노예가 되는 것을 보고 간하다 죽임을 당했다.
周 武王이 殷 紂王을 토벌하자 微子는 투항하였다. 武王은 紂王의 아들 武庚祿父에게 殷 왕조의 제사를 잇게 하고 箕子를 방문하여 鴻範九等을 듣고 朝鮮에 봉했으나 신하로 대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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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穆公 和
선공에게 태자 與夷가 있었다. 19년에 선공이 병이 나자 동생 和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하면서 “아비가 죽으면 아들이 뒤를 잇고, 형이 죽으면 동생에게 돌아가는 것은 천하에 통용되는 이치다. 내가 화를 세우겠다.”라고 했다. 화가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결국 받아들였다. 선공이 죽고, 동생인 화가 자리에 오르니 이가 穆公이다.
목공 9년에 병이 들자 아들 풍을 정나라로 옮겨 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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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殤公 與夷 09
9년에 대사마 孔父嘉의 아내가 아름다웠는데, 외출했다가 길에서 太宰 華督을 만났다. 화독은 공보가의 아내가 마음에 들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화독이 공보가의 아내가 탐이 나서 사람을 시켜 나라 안에 선전하길 “상공이 즉위한 지 10년 만에 열한 차례나 전쟁을 일으켜 인민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 모두 공보가가 한 짓이니 내가 공보가를 죽여 인민들을 편하게 하겠다.”고 했다. 이해에 노나라는 그 국군 隱公을 시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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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莊公 馮
10년에 화독이 공보가를 공격해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았다. 상공이 분노하자 상공마저 시해하고 정나라에서 목공의 아들인 풍을 맞아들여 옹립하니, 이가 莊公이다.
장공 원년에 화독이 相이 되었다.
9년에 정나라의 祭仲을 잡고 突을 정나라의 국군으로 옹립하려 했다. 제중이 이를 받아들이자 마침내 돌을 옹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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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游
11년 가을에 민공과 남궁만이 사냥을 나가서 바둑을 두다가 다툼이 벌어졌다. 힘이 셌던 남궁만은 蒙澤에서 바둑판으로 민공을 쳐서 죽였다. 大夫 仇牧이 이를 전해 듣고는 병사를 이끌고 궁문에 이르렀다. 남궁만이 구목을 때리니 구목은 이가 문짝에 부딪치며 죽었다. 그해 태재 화독을 죽이고 바로 공자 游를 국군으로 옹립했다.
공자 몇은 蕭나라로 달아났고, 공자 禦說은 亳나라으로 도망쳤다. 남궁만의 동생인 南宮牛는 병사를 거느리고 박나라를 포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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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桓公 禦說
겨울에 소나라와 송나라에 있던 공자들이 함께 남궁우를 공격해 죽이고, 송나라의 새로운 국군 유를 시해한 다음 민공의 동생 어열을 세우니, 이가 바로 桓公이다. 남궁만은 陳나라로 달아났다. 송나라가 진나라에 뇌물을 주고 요청하니, 진나라는 여자를 보내 남궁만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가죽으로 남궁만을 싸서 송나라로 돌려보냈다. 송나라는 남궁만을 썰어서 젓갈을 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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