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 "동유낙랑 또는 최리낙랑을 낙랑군과 혼동하였다."
▐ 삼국사기에 나오는 동유낙랑과 최리낙랑은 한나라가 대동강 유역에 설치한 낙랑군과 어울리지 않고 중국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되었다가 폐지된 지역에서는 낙랑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위세로 삼는 경우가 있었을 듯하다. 동유낙랑과 최리낙랑은 그런 경우의 사례로 설명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전래 기록에 나오는 낙랑과 후한서에 나오는 낙랑군을 짜맞추다보니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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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44 後漢書(445)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 光武封蘇馬諟 爲漢廉斯邑君使 屬樂浪郡 四時朝謁 한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대하여 한의 염사읍군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 ▐ 삼국지에 실린 위략의 염사착 이야기와 동일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왕망의 사후 낙랑과 그 주변 나라들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韓의 廉斯는 낙랑에 기대는 방향으로 생존을 모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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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44 後漢書(445)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 光武封蘇馬諟 爲漢廉斯邑君使 屬樂浪郡 四時朝謁 한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대하여 한의 염사읍군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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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06 後漢書(0445)
44년에 韓의 廉斯 사람인 蘇馬諟 등이 樂浪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光武帝는 蘇馬諟를 封하여 漢의 廉斯邑君으로 삼아 樂浪郡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朝謁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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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07 後漢書(0445)
靈帝 말년에 韓과 濊가 모두 강성해져 郡縣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韓으로 도망하여 流入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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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95.05 ◾東有樂浪
이 낙랑은 樂浪郡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한나라는 44년에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樂浪¹에 와서 공물을 바치자 한나라의 염사읍군으로 삼아 樂浪郡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한 적이 있다. 그 염사읍군이 백제의 동쪽에 있어 백제로부터 樂浪으로 지칭되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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