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6 高麗史(1451)
이지영이 삭주분도장군이었을 때 양수척이 흥화도와 운중도에 많이 살았다. 거란군이 오자 기꺼이 항복하고 길잡이가 되었으므로, 거란군은 산천의 주요 지형과 도로의 사정을 훤히 알게 되었다. 양수척은 태조가 백제를 공격할 때 제압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의 후손들로서, 본래 관적과 부역이 없었으며, 수초가 자라는 곳을 따라 일정한 거처가 없이 옮겨 다니면서 사냥을 일삼고 유기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기생 무리는 본래 유기장 집안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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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6 高麗史(1451)
▐ 삭주는 서남쪽으로 의주와 접했고 북쪽으로는 압록강에 접했다. 흥화도는 청천강에서 압록강 하구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운중도는 평양과 압록강변을 이어주는 길로 흥화도의 동쪽에 있었다. 신라는 가라를 병합한 뒤 가라인을 충주로 이주시킨 듯하며 백제는 신라 대야성을 함락시킨 뒤 그 주민들을 백제 서부로 이주시켰다. 왕고도 견훤백제를 병합한 뒤 그 유민들을 서북 지역으로 이주시켰을 가능성은 존재하며 그것이 양수척의 기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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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6 고려사(1451) - 楊水尺
이지영이 삭주분도장군으로 있을 때에 양수척이 흥화·운중도에 많이 살았다. ... 양수척 등이 크게 원망하였다. 거란의 군사가 이르자 양수척이 맞아들여 항복하고 길을 인도한 까닭으로 ... 모두 알게 되었다. 양수척은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에 제어하기 어려웠던 유종으로 본래 관적과 부역도 없었다. 수초를 따라 옮겨 살면서 일정한 거주가 없이 다만 사냥을 일삼고 또 고리를 엮어 이를 판매하여 생업을 삼았다. 대개 기생들은 본래 유기장(柳器匠)의 후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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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6 고려사(1451) - 楊水尺
흥화도와 운중도는 서북 지역의 역참로다. 삭주는 흥화도에 속했다. 고리는 유기라고도 하는데 버드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그릇을 말한다. 楊水尺이란 명칭은 여기서 나온 듯하다. 왕건은 936년에 견훤백제를 병합하였는데, 이때 견훤백제의 도읍이었던 전주의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사민시켰을 것이다. 병합에 사민이 따라오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것을 이 기록과 연결시켜보면 전주의 주민들을 서북 지역으로 이주시켰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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