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4 三國志(289) 毌丘儉 02
儉遂束馬縣車 以登丸都 屠句驪所都 斬獲首虜以千數 관구검은 말을 묶고 수레를 달아 환도에 오른 뒤 구려의 도읍을 도륙하고 포로가 된 수천명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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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4 三國志(289) 毌丘儉 03
句驪沛者名得來 數諫宮 (臣松之案東夷傳 沛者 句驪國之官名) 宮不從其言 得來歎曰 立見此地將生蓬蒿 遂不食而死 舉國賢之 儉令諸軍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구려의 패자는 이름이 득래인데 궁에게 수차례 간하였으나 궁은 듣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이 땅에 장차 쑥이 자라는 걸 보게 되리라'며 굶어 죽었다. 검이 군사들에게 그의 무덤을 허물지 말고 나무를 베지 말며 잡힌 그의 처자식은 풀어 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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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4 三國志(289) 毌丘儉 04
宮單將妻子逃竄 儉引軍還 궁은 처자식만 데리고 도망갔고 검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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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三國志(289) 毌丘儉
六年 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世語曰 頎字孔碩 東萊人 晉永嘉中大賊王弥 頎之孫)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慎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諸所誅納八千餘口 245년에 다시 정벌하니 궁은 매구(북옥저)로 도망갔다. 검이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 쫓게 했는데 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가 숙신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바위에 공을 새기고 또 환도산에 새기기를 불내성이라 명명하였다. 죽이고 사로잡은 게 모두 8천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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