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0 성호사설 - 蠻子
충렬왕 때에 원 나라에서 만자군(蠻子軍, 남송 유민으로 구성된 원나라 군대) 1만 4천 명을 보내어 해주ㆍ염주ㆍ백주의 3개 주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만자군은 남만 지방의 해귀족(海鬼族)이다. 지금 무과 시험에서 굳센 활을 당기어 먼 데까지 쏘는데 거의 황해도에서 독차지하여 서울 사람으로서는 상대하지 못하니 아마 그들의 후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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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0 성호사설 - 蠻子
전쟁이 끝나면 외국군도 돌아간다. 설령 머물렀다해도 활쏘기 문화가 500여년 가까이 이어질 수는 없다. 물론 활쏘기 실력이 유전되는 것도 아니다. 이 대목에서 성호사설 저자의 설명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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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0 성호사설 - 契丹場
발해가 망하고 나서 그 백성들이 모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글안이 망했을 때도 그 백성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이것을 거란장(契丹場)이라 하므로 서쪽 사람들은 대체로 건장하고 힘쓰기를 좋아하여 옛날 풍속이 없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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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0 성호사설 - 契丹場
염주와 백주는 해주와 개성 사이에 있다. 발해는 926년에 망했고 거란의 포로가 들어온 것은 1219년이므로 두 유민의 발생시기는 300여년이나 차이가 난다. 따라서 거란장이 생길 때 발해 유민은 정체성이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또 발해는 정착민이었고 거란은 유목민이었으니 두 유민의 속성도 달랐다. 그러나 성호사설 저자의 인식에는 발해인이든 거란인이든 똑같이 건장하고 힘쓰기 좋아하는 풍속을 지닌 북방 난민들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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