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8.09 조선상고사(1931)
고구려의 군사가 요서에 침입하여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 (韋沖)과 접전을 벌이다가 거짓 패하여 임유관에서 나오니, 수의 문제가 30만 대군을 들어 한왕(漢王) 양양(楊諒)으로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을 삼아 임유관으로 나오고, 주나후(周羅喉)로 수군총관(水軍總 管)을 삼아서 바다로 나아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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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98.09 조선상고사(1931)
▐ 위충은 요서총관이 아니고 영주총관이며, 여기에 나오는 요서는 임유현이 있던 난하 유역의 요서군이 아니라 요하 서쪽 대릉하 유역을 말한다. 몇 년 후 이곳에 요서군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낙랑고려가 임유관을 나올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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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98.09 조선상고사(1931)
주나후는 평양으로 향한다는 말을 퍼뜨렸으나 실은 양식 실은 배를 인솔하여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양의 군량을 대주려 함이었다. 강이식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 가운데 들어가 이를 맞아 쳐서 배를 격파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성책을 지키고 나가 싸우지 말라하니, 수의 군사는 양식이 없는데다가 또한 6월의 장마를 만나 굶주림과 전염병에 숱한 사람이 낭자하게 죽어가 퇴군하기 시작하였다. 강이식이 이를 추격하여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기를 얻어 개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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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98.09 조선상고사(1931)
▐ 강이식이란 인물과 그에 얽힌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로 볼 만한 근거가 없다. 수서에는 한왕 양이 군사를 이끌고 임유관을 나와 요하에 이르렀고 주라후는 동래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을 향했다는데, 이는 뭍과 바다 양쪽으로 침공하는 중국의 전형적인 전쟁 방식으로, -109년에 있었던 한나라의 조선 침공이나 612년에 있었던 수나라의 고려 침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수서의 기록이 자연스럽고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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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98.09 조선상고사(1931)
수서에는 “양양의 군사는 장마에 전염병을 만나고, 주나후의 군사는 풍랑을 만나 퇴각하였는데 , 죽은 자가 열에 아흡이었다.”고 하여 불가항력의 자연의 힘에 패한 것이고, 고구려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고 기록하였으나 이는 중국의 체면을 위해 치욕을 숨기는 저들의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한 것이니, 임유관 싸움은 물론이고 다음 장에서 말할 살수 싸움의 기록에도 그러한 투의 기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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