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1~1115 高麗史(1451)
女眞은 본디 靺鞨의 遺種으로 隋·唐 사이에 勾高麗에 병합되었으며, 나중에 취락을 이루고 산택에 흩어져 살면서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였다. 定州·朔州 근처의 국경에 거주하는 자가 비록 간혹 내부하기도 했으나 잠시 신하노릇을 하다가 갑자기 배신하기도 하였다. 盈哥와 烏雅束에 이르러 서로 이어서 추장이 되니 자못 무리의 인심을 얻어 그 기세가 점차 사나워졌다. ▐ 수서(636)에 고려가 598년에 말갈 기병 만여기를 동원하여 요서를 침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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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4.01.06 ⁻ 高麗史(1451)
여진이 定州關 밖에 주둔하니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까 의심하여 추장 許貞과 羅弗 등을 꾀어 잡아 廣州에 가두고 고문하였는데, 과연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었으므로 마침내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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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4.01.08 ꜛ 高麗史(1454)
마침 변장 이일숙 등이 아뢰기를, “여진은 허약하여 두려워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손에 넣지 않고 기회를 잃으면 후에 반드시 골칫거리가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오아속이 또 別部의 夫乃老와 사이가 벌어져 군사를 일으켜 그를 공격하려고 국경 근처에 와서 주둔하자, 왕이 임간에게 명령하여 가서 대비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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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4.02.08 ꜛ 高麗史(1451)
임간이 공을 세우는데 급급하여 병사를 이끌고 깊이 들어갔는데 그들에게 공격을 받아 연달아 패배하여 죽은 자가 거의 절반이었다. 여진이 승세를 타고 定州 宣德關의 성에 난입하여 죽이고 노략질 한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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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史(1451) 윤관 열전
伊位의 경계 위로 산이 잇달아 연결되어 있는데, 동해안으로부터 우뚝 솟아 우리의 북쪽 변방에 이르기까지 매우 험하고 황량하여 사람이나 말이 넘어갈 수가 없었다. 틈새로 길이 하나 있고 속칭 甁項이라 하였는데, 출입하는 구멍이 하나뿐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공을 세우려는 사람이 때때로 의견을 올리기를, 그 길을 막아버리면 오랑캐의 길이 끊어질 것이니 군사를 내어 그들을 평정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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