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 광개토왕릉비(414)
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龍頁昇天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황제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사기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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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鄒牟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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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 儒留
유명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儒留王)은 도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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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 大朱留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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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광개토왕릉비(414)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그런데 왜가 391년에 ▨을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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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6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414)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 아단성(阿旦城, 阿且城이라고도 표기되어졌는데 서울의 광나루 북쪽 기슭에 있는 峨嵯山城으로 비정된다.) ... 백잔이 의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가 곤핍해져, 남녀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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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6¦광개토왕릉비(414)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이에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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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9 廣開土王陵碑(414)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백제가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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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9 廣開土王陵碑(414)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倭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倭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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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9 廣開土王陵碑(414)
▐ 고려는 371년에 백제가 대동강 유역에 있는 平壤城에 침공해오자 이를 막다 왕이 전사한 바 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平穰도 대동강 유역에 있는 平壤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백제는 한성에 있었다. 이 광개토왕릉비는 집안에 세워져 있는데, 이로써 당시 고려의 도읍도 그 인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371년에 백제에 패하면서 환도성 인근으로 도읍을 옮긴 정황과도 잘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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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0 廣開土王陵碑(414)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任那加羅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安羅人 ... 신라성 ... 왜구가 크게 무너지고  ... 옛적에는 新羅寐錦이 몸소 고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을 한 일이 없었는데,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 하여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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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4 廣開土王陵碑 ⑧
▐ 광개토왕릉비는 396년에 백제를 대파하여 복종을 받아냈다고 하나 백제는 이내 왜와 화통하였다. 광개토왕릉비는 또 400년에 5만의 군대를 보내어 신라와 가라에 들어온 왜군을 무찔렀다고 하나 404년에 왜군은 고려의 대방을 직접 공격하였다. 삼국사기에는 401년에 고려에 가 있던 신라의 볼모가 돌아오고 이듬해에 신라는 왜에 볼모를 보냈다고 되어 있다. 광개토왕의 공적에는 허세가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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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4¦廣開土王陵碑(414)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王躬率▨▨從平穰 ▨▨▨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煞無數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 지역에 침입하였다. …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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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0 廣開土王陵碑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國駭□□□□□□□ □□王恩普覆 於是旋還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守墓人烟戶 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 東海賈國烟三看烟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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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0 廣開土王陵碑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餘城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무릇 공파한 城이 64개, 村이 1,400이었다. 수묘인 연호 - 賣句余 민은 국연이 2가, 간연이 3가. 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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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0 廣開土王陵碑
▐ 추모왕의 속민이라는 표현은 -28년에 추모왕이 北沃沮를 정복한 것을 말하는 듯하고, 東夫餘는 285년에 夫餘가 망할 때 沃沮로 도피한 왕족들이 세운 나라인 듯하다. 여기에 나오는 賣句는 삼국지(289)에 나오는 買溝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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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4 守墓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 계실 때에 교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 왕들이 다만 원근에 사는 구민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해 온 한인과 예인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과 예의 220가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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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4 廣開土王陵碑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永樂大王이라 하였다.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는 사해에 떨쳤다. 쓸어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甲寅年 9월 29일 을유에 산릉으로 모시었다. ▐ 광개토왕은 辛卯年(391)에 18세로 왕이 되었다가 39세에 죽었으니 죽은 해는 壬子年(412)이다. 甲寅年은 414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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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4 廣開土王陵碑 高麗朱蒙說話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卽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 履龍頁昇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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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4 廣開土王陵碑 高麗朱蒙說話
시조 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 부여의 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라고 하였다.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건너가서 비류곡 忽本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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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4 廣開土王陵碑 高麗朱蒙說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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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4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백제과 신라는 옛적부터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은 보이지 않고 백제, 신라 그리고 임나가 최초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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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4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洒掃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해 온 한인과 예인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 광개토왕은 한성백제를 정벌하고 많은 사람들을 끌고갔다. 당시 신라와는 동맹관계였으니 여기에 나오는 한인은 사실 백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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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4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洒掃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해 온 한인과 예인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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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4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백제과 신라는 옛적부터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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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永樂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는 사해에 떨쳤다. 쓸어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으로 모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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