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96¦광개토왕릉비(414)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이에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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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9 廣開土王陵碑(414)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倭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倭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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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9 廣開土王陵碑(414)
▐ 고려는 371년에 백제가 대동강 유역에 있는 平壤城에 침공해오자 이를 막다 왕이 전사한 바 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平穰도 대동강 유역에 있는 平壤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백제는 한성에 있었다.
이 광개토왕릉비는 집안에 세워져 있는데, 이로써 당시 고려의 도읍도 그 인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371년에 백제에 패하면서 환도성 인근으로 도읍을 옮긴 정황과도 잘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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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0 廣開土王陵碑(414)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任那加羅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安羅人 ... 신라성 ... 왜구가 크게 무너지고 ... 옛적에는 新羅寐錦이 몸소 고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을 한 일이 없었는데,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 하여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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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4 廣開土王陵碑 ⑧
▐ 광개토왕릉비는 396년에 백제를 대파하여 복종을 받아냈다고 하나 백제는 이내 왜와 화통하였다. 광개토왕릉비는 또 400년에 5만의 군대를 보내어 신라와 가라에 들어온 왜군을 무찔렀다고 하나 404년에 왜군은 고려의 대방을 직접 공격하였다. 삼국사기에는 401년에 고려에 가 있던 신라의 볼모가 돌아오고 이듬해에 신라는 왜에 볼모를 보냈다고 되어 있다.
광개토왕의 공적에는 허세가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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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0 廣開土王陵碑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餘城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무릇 공파한 城이 64개, 村이 1,400이었다.
수묘인 연호 - 賣句余 민은 국연이 2가, 간연이 3가. 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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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4 守墓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 계실 때에 교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 왕들이 다만 원근에 사는 구민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해 온 한인과 예인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과 예의 220가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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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4 廣開土王陵碑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永樂大王이라 하였다.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는 사해에 떨쳤다. 쓸어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甲寅年 9월 29일 을유에 산릉으로 모시었다.
▐ 광개토왕은 辛卯年(391)에 18세로 왕이 되었다가 39세에 죽었으니 죽은 해는 壬子年(412)이다. 甲寅年은 414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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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永樂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는 사해에 떨쳤다. 쓸어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으로 모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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