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1 擇里志 - 1826 이전 無名子集
又曰丁酉倭破楊元於南原從全州北上公州時邢玠以捴督駐遼東經理楊鎬率十萬兵次平壤方夕食於練光亭飛馬報至鎬卽上馬自平壤至漢陽七百里而一日二夜馳到使㺚將解生攞貴賽貴楊登山等四人率鐵騎四千挾弄猿數百騎狙伏於素沙橋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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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에 왜적이 양원을 남원에서 격파하고 전주를 거쳐 공주로 북상할 때, 경리 양호가 10만의 병사를 이끌고 평양에 당도하였다. 연광정에서 한창 저녁밥을 먹는 도중에 비마의 급보가 이르자, 양호는 즉시 말에 올라 평양으로부터 한양에 이르는 칠백 리 길을 하루 낮 이틀 밤에 달려가, 달단의 장수 해생·나귀·새귀·양등산 등 네 명으로 하여금 철기 4천과 농원 수백 기를 거느리고 소사교 아래에 매복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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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見倭自稷山如林而北未至百餘步先縱弄猿猿騎馬執鞭鞭馬突陣倭國本無猿始見猿似人非人咸疑怪駐陣眄望旣逼猿卽下馬入陣中倭欲擒擊猿善躱避貫穿一陣陣亂解生等急縱鐵騎蹂之倭不及施一銃矢而大崩潰南走伏尸蔽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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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을 멀리서 바라보다가 백여 보 앞에 이르자 먼저 농원을 풀어놓으니 원숭이들은 말에 올라 채찍을 잡고 말에 채찍질을 가하여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왜국에는 본래 원숭이가 없어 사람 같기도 하고 사람도 아닌 원숭이를 처음 보고는 모두 괴이한 마음이 들어 진군을 멈추고 멀거니 바라보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원숭이가 즉시 말에서 내려 진중으로 돌입하니 왜적들이 잡아 죽이려 하였으나 원숭이가 몸을 잘 피하여 온 진중을 꿰뚫고 지나가서 진영이 흐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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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전투에 鐵騎를 가장 먼저 투입하는 것을 고려할 때, 㺚將이 이끄는 鐵騎보다 먼저 전투에 투입된 弄猿數百騎는 중국 남부의 狼兵과 같은 부대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말을 타고 채찍을 가하여 적진으로 돌진하거나(騎馬執鞭鞭馬突陣) 말에서 내려 적진으로 들어가거나(下馬入陣中) 요리조리 피해 진중을 뚫고 지나가는(善躱避貫穿一陣) 정도의 일은 잔나비가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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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萬曆野獲編(1618)이나 五雜俎(1644-)에 나오는 이야기를 척계광이 왜구를 교란하는 데 잔나비를 활용했다는 정도로만 받아들이면, 척계광이 1566년 이후 북쪽 변경으로 임지를 옮겼을 때 이 기술을 달단으로 가져갔고, 그것이 그곳의 기마 전술과 결합하여 잔나비 기병으로 발전했으며, 조일전쟁에 참전한 㺚將이 鐵騎와 함께 그 잔나비 기병을 이끌고 조선에 왔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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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런 잔나비 부대는 특이하기도 하지만 규모도 크고 전공도 세웠기 때문에 명나라 측의 기록에 나와야 자연스러운데,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이조의 기록에도 소사 전투 당시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15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의 기록에 처음 나타난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聱漢文集과 亂中雜錄에 나오는 정도의 이야기만 역사적 사실이고 소사 전투 이야기는 세월이 흐르며 萬曆野獲編(1618)이나 五雜俎(1644-)의 사례처럼 부풀려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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