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3 高麗史(1451)
御內殿召大匡朴述希親授訓要 왕이 내전에 나아가 대광 박술희를 불러 친히 훈요를 내렸다. 十訓之終皆結中心藏之四字嗣王相傳爲寶 십훈의 끝은 모두 ‘마음속에 이를 간직하라’는 네 글자로 맺었는데, 후대의 왕은 이를 서로 전하여 보배로 삼았다. ▐ 박술희에 대해서는 열전에서 혜성군 사람이고, 아버지는 대승 박득의라고 되어 있다. 혜성군은 신라 웅주의 군으로 지금의 당진이다. 박씨신라선원세보에는 박득의가 박제상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http://qindex.info/i.php?x=8671
 0943 高麗史(1451) ②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미루어 점쳐서 개창한 것으로, 도선이 이르기를, ‘내가 점을 쳐 정한 곳 외에 함부로 덧붙여 창건하면 지덕이 줄어들고 엷어져 조업이 길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후세의 국왕이나 공후·후비·조신이 각각 원당이라 일컬으며 혹시 더 만들까봐 크게 근심스럽다. 신라 말에 다투어 사원을 짓다가 지덕이 쇠하고 손상되어 결국 망하는 데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http://qindex.info/i.php?x=8673
 0943 高麗史(1451) ②
▐ 왕건은 도선과 그의 풍수지리설에 심취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선은 신라 무주 영암군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http://qindex.info/i.php?x=8677
 0943 高麗史(1451) ④
우리 동방은 옛날부터 중국의 풍속을 흠모하여 문물과 예악이 다 그 제도를 따랐으나, 지역이 다르고 인성도 각기 다르므로 꼭 같게 할 필요는 없다.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로 풍속이 같지 않고 말도 다르니 의관제도를 삼가 본받지 말라.
http://qindex.info/i.php?x=24675
 0943 高麗史(1451) ④
▐ 왕건은 926년에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데 대한 보복으로 942년에 거란이 보낸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 50마리를 굶겨 죽인 바 있다. 927년에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와 궁녀들을 집단 강간한 데 대해서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거란에 대한 경계는 훈요십조 4조에 담겨 있고 견훤백제의 유민에 대한 경계는 훈요십조의 8조에 담겨 있다.
http://qindex.info/i.php?x=24676
 0943 高麗史(1451) ⑧
❶車峴以南公州江外❷山形地勢並趨背逆人心亦然 彼下州郡人參與朝廷與王侯國戚婚姻得秉國政則或變亂國家或❸㗸統合之怨犯蹕生亂 차현 이남과 공주의 금강 바깥쪽은 산의 모양과 땅의 기세가 모두 거스르게 뻗어 있는데 사람들의 마음도 그러하다. 그 아래 주군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고 왕후나 외척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사를 잡게 되면, 국가의 변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통합당한 원한을 품고 왕실을 침범하며 난을 일으킬 수도 있다.
http://qindex.info/i.php?x=8669
 0943 高麗史(1451) ⑧
且其曾屬官寺奴婢津驛雜尺 或投勢移免或附王侯宮院姦巧言語弄權亂政以致災變者必有之矣 雖其良民不宜使在位用事 또 일찍이 관청에 예속된 노비와 진‧역의 잡척이 권세가에게 투탁하여 신분을 옮기거나 역을 면제받기도 할 것이며, 왕후나 궁원에 빌붙어 간교한 말로 권력을 희롱하고 정사를 어지럽게 하여 재앙에 이르게 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록 양민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그를 관직에 올려 일을 맡겨서는 안된다.
http://qindex.info/i.php?x=86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