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기(BC91) 요약
❺ 기원전 202년에 중국을 통일한 漢은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렵다며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爲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屬燕
❻ 기원전 109년에 漢의 좌장군은 패수 위의 군사를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험성 아래에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左將軍破浿水上軍乃前至城下圍其西北
이는 패수와 왕험성 사이에 큰 강이 없었다는 정황이므로 패수와 왕험성을 각각 청천강과 평양성으로 설정하면 자연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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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09 ◾
齊의 중심지는 발해만 안쪽에 있었다. 齊 병력을 모아 출발시켰다면 당연히 이곳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발해 해안선은 내륙으로 더 깊이 들어가 있었다. 이곳에서 배를 띄우면 발해에 배를 띄우는 것이 된다. 당시의 항해는 가능한 한 해안선을 따라갔다. 조선을 향해 요동 반도로 건너가든 한반도로 바로 건너가든, 발해만 안쪽에서 띄운 배는 일단 齊의 해안을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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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09 漢의 조선 침공
▐ 齊의 중심지는 발해만 안쪽에 있었다. 齊 병력을 모아 출발시켰다면 당연히 이곳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발해 해안선은 내륙으로 더 깊이 들어가 있었다. 이곳에서 배를 띄우면 발해에 배를 띄우는 것이 된다. 당시의 항해는 가능한 한 해안선을 따라갔다. 산동 반도에서 요동 반도로 건너가든 한반도로 바로 건너가든, 발해만 안쪽에서 띄운 배는 일단 齊의 해안을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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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09 ~ -0108 史記(-91) 요약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좌장군 순체는 요동에서 출발하였다.┆좌장군의 졸정인 다가 요동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전하였다가 패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다는 도망하여 돌아왔다.┆우거는 태자를 보내 들어가 사죄하게 하고 말 5천필과 군량미를 바쳤다.┆태자는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속이고 죽일까 의심하여 패수를 건너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버렸다.┆좌장군이 패수 위의 군사를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험성 아래에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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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09 漢의 조선 침공
齊의 중심지는 발해만 안쪽에 있었다. 齊 병력을 모아 출발시켰다면 당연히 이곳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발해 해안선은 내륙으로 더 깊이 들어가 있었다. 이곳에서 배를 띄우면 발해에 배를 띄우는 것이 된다. 당시의 항해는 가능한 한 해안선을 따라갔다. 조선을 향해 요동 반도로 건너가든 한반도로 바로 건너가든, 발해만 안쪽에서 띄운 배는 일단 齊의 해안을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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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장성과 한사군의 위치
한나라가 설치한 4군은 낙랑, 진번, 임둔 그리고 현도다.
진번, 임둔 그리고 현도는 나중에 각각 대방, 예 그리고 옥저로 변했다.
물론 이와 같은 재구성이 사서의 기록과 100%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사군의 위치를 요동이나 요서로 옮겨 보면 사서의 기록과 99% 어긋난다.
이것은 알비뇨 까마귀를 가지고 까마귀의 색은 희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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