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11.30 피 묻은 십자가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되었지요” ※1982년에 한경직 목사가 한 말이다. 그는 신의주 제이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소련 군정과 충돌하다 1946년 윤하영 목사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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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1.30¦피 묻은 십자가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되었지요” ※1982년에 한경직 목사가 한 말이다. 그는 신의주 제이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소련 군정과 충돌하다 1946년 윤하영 목사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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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 한경직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되었지요” ※그는 신의주 제이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소련 군정과 충돌하다 1946년 윤하영 목사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해 11월에 서북청년단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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