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0044 王調, 崔理, 廉斯
왕망 반대 세력이 세운 경시제가 25년에 쫓겨나자 낙랑의 토착인 王調가 군수를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칭했다. 한나라 왕조를 복원한 광무제는 30년에 태수 왕준을 낙랑에 보내 난을 진압하게 하였다. 광무제는 30년에 낙랑군의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縣을 모두 侯國으로 만들었다. 32년에 낙랑왕 崔理는 옥저에서 만난 맥고려 왕자 호동에게 딸을 시집보냈으나 37년에 맥고려의 침공을 받고 병합되었다. 44년에는 한국의 廉斯 사람들이 낙랑에 귀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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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30 後漢書(445)
建武六年 光武遣太守王遵將兵擊之 至遼東 閎與郡決曹史楊邑等共殺調迎遵 광무제가 태수 왕준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게 하였다. 요동에 이르자 왕굉이 결조사 양읍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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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44 後漢書(445)
▶삼국지에 실린 위략의 염사착 이야기와 후한서의 염사 사람 이야기는 廉斯라는 명칭과 韓에서 낙랑으로 귀순한다는 이야기가 유사하므로 동일한 사건이다. 후한서는 韓에 대해 삼국지의 기록을 대부분 계승하고 있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염사읍군의 이야기를 취하고 염사착의 이야기는 취하지 않았다. 최리의 낙랑국이 맥고려에 병합되고 한나라 왕조가 팽창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韓의 廉斯는 한나라 왕조에 기대는 방향으로 생존을 모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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