鐵嶺以北의 明 統治問題
by Silla on 2020-11-28
이 鐵嶺以北의 明 統治問題는 高麗와 明關係를 다시 惡化시킨 契機가 되었다. 鐵嶺以北의 遼東歸屬에 대한 明側의 通達은 禑王 14年 2月에 賀聖節使로 明에 갔던 偰長壽가 돌아오면서 傳達되었다. 곧 ‘口宣聖旨曰 …… 鐵嶺迆北 元屬元朝 並令歸之遼東 其餘開元·瀋陽·信州等處軍民 聽從復業’(『高麗史』辛禑 14年 2月條)이란 것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具體的인 것이『明實錄』洪武 20年 12月 壬申條에 詳論되어 있다. 『高麗史』의 記事는『明實錄』보다 2個月이나 늦은 것이지만, 高麗側에서는 이 偰長壽의 報告以前에 이미 그 事情을 짐작하고 있었다. 『高麗史節要』辛禑 14年 2月條에
崔瑩與諸將相議 攻定遼衛及請和可否 皆從和議 時遼東都司 遣李思敬等 渡鴨綠江 張榜曰 戶部奉聖旨 鐵嶺迤北·迤東·迤西 元屬開原所管 軍民漢人女眞達達高麗 仍屬遼東 故有此議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면 鐵嶺은 어디인가. 그 所在問題는 黃城(滿洲 輯安縣 所在)이라고 본 池內宏의 생각(「高麗辛禑朝に於ける鐵嶺問題」『東洋學報』8)과 오늘날의 咸鏡道·江原道의 境界에 있는 鐵嶺이라는 和田 淸의 主張(「三萬鐵嶺衛の建設」『明初の滿洲經略』上篇), 그리고 鐵嶺은 지금의 平安北道 江界의 古地名인 秃魯와 近似한 만치 江界가 아니겠느냐는 稻葉岩吉의 假說(「鐵嶺衛の位置を疑ら」『淸丘學叢』18)등이 있었지만, 末松保和는 前揭論文에서『吏文』卷2에 있는 洪武 21年 2月 25日字의 ‘鐵嶺等處榜文張掛咨’ 속의 ‘鐵嶺·迤北·迤東·迤西·三散(北靑)·哈刺(洪原)·雙城(永興)等處大小衛門云云’을 들어서 和田 淸의 主張에 따르고 있다. 사실 이 鐵嶺은 咸鏡道와 江原道의 境界上에 있었던 것이다(但, 當時 明에서는 遼陽 附近에 準備過程에서 暫時 둔 일은 있었던 것 같다). 여하간 이 鐵嶺衛는 그 뒤 洪武 26年 4月에 遼陽城 東北 80里인 지금의 奉集堡(당시의 奉集縣)으로 退置된다. 그런데 明의 鐵嶺以北 直轄通達은 北元勢力을 驅逐하면서 對接하게 된 高麗와 明의 國境問題를 事前에 設定하려는 것이었다.
原文의 ‘開元’은 元에서 設置한 開元路에서 시작한다. 遼陽省의 所屬이었다. 애초에는 金나라 上京圖內의 地名이었으나 元이 이곳에 進駐해서 두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黃龍府(지금의 吉林 農安縣)에 治所가 있었으나, 뒤에 咸平府(지금의 奉天 開原縣)로 移治했다. 明初에 그곳에 衛를 設置하고 開元을 ‘開原’이라고 改稱했는데 이것은 明 太祖인 朱元璋의 避諱에서였다(『中國古今地名大辭典』參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