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솔까이야기 > 1991 미군철수 자주화 > 교체기 > 元明 교체기 > 1388 철령위와 위화도 회군
 
 철령위와 위화도 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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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8-02 고려사(1451)
설장수가 명나라 수도에서 돌아와 황제의 말을 전하였다. "철령(鐵嶺) 이북은 원래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니 요동(遼東)에 귀속시키겠다. 그 나머지 개원(開元)·심양(瀋陽)·신주(信州) 등지의 군과 민은 원래의 생업에 복귀시키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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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8-02 고려사(1451)
우왕이 박의중을 보내어 청하였다. "철령 이북은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1258년에 몽골의 산길대왕·보지관인 등이 여진을 정복하자 본국의 정주인 탁청과 용진현인 조휘가 화주 이북 지방을 들어 항복하였습니다. 金의 요동 함주로(咸州路) 부근의 심주에 쌍성현(雙城縣)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본국의 함주(咸州) 근처 화주의 오래된 작은 성 2개와 혼동시켜 화주를 쌍성(雙城)이라 칭하고 조휘와 탁청을 각각 쌍성총관과 천호로 삼아 인민을 관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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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8-03 고려사(1451)
명나라 후군도독부에서 요동백호 왕득명을 보내 철령위를 설치한 사실을 통보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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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8-03 고려사(1451)
서북면도안무사 최원지가 보고하기를,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지휘 2인을 보내 병사 천여 명을 데리고 강계(江界)에 이르러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합니다. 황제가 먼저 본 위(衛)의 진무 등의 관원을 설치하여 모두 요동(遼東)에 이르렀습니다. 요동에서 철령까지 70참을 두고 참마다 100호를 둔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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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8-04 고려사(1451)
당초 우왕이 최영과 둘이서만 의논해 요동 공격을 결정지어놓고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날 최영과 우리 태조를 불러, “과인이 요양을 공격하려고 하니 경들은 힘을 다해야 할 것이오.”라고 당부했다. ... 좌군과 우군을 합친 총 병력은 38,830명이었고, 사역하는 인원이 11,634명이었으며 동원된 말이 21,682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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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8-04 명사(1739)
우(禑)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철령(鐵嶺)의 땅은 실상 대대로 고려에서 지켜 왔으니 과거대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가 예전에는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았으면서 이제와서 철령이라 꾸며 말하니 거짓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뜻을 짐의 말로서 타일러 본분을 지키게 함으로써 쓸데없는 상쟁의 원인을 낳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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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8-04 명사(1739)
중국 대륙에서 원나라를 교체한 명나라는 철령 이북이 원래 원나라의 땅이었다며 왕고에게 이 땅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원나라는 그 전성기에 철령 이북을 차지하고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100여년간 직접 통치한 바 있다. 왕고는 원나라가 쇠약해지자 30여년 전에 이곳을 탈환했었다.  명나라는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며 관원을 파견하여 압록강에까지 이르렀고, 왕고는 철령 이북이 원래 왕고의 땅인데 원나라가 부당하게 빼앗았었다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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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8-05 고려사(1451)
“만일 명나라 영토를 침범함으로써 천자로부터 벌을 받는다면 즉각 나라와 백성들에게 참화가 닥칠 것이다. 내가 이치를 들어서 회군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께서는 잘 살피지 않으시고 최영 또한 노쇠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는 그대들과 함께 직접 주상을 뵙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자세히 아뢰고 측근의 악인들을 제거해 백성들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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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8-05-13 고려사
좌우도통사가 상언하기를, “以小事大 保國之道 我國家統三以來 事大以勤 작은 것으로서 큰 것을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존하는 방도이니, 우리나라는 삼한을 통합한 이래로 부지런히 사대하여 왔습니다. 伏惟 殿下特命班師 以答三韓之望 원컨대 전하께서 특별히 회군을 명하시어 삼한의 기대에 답하시옵소서.” 라고 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이 듣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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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8-06 고려사(1451)
이성계가 마침내 암방사의 북쪽 고개로 올라가서 대라를 한 차례 불게 하자 모든 부대들이 화원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고 최영을 내놓으라고 고함을 질렀다. ... 우왕이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하자 최영이 두 번 절하고 곽충보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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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8-06 고려사(1451)
다시 홍무 연호를 사용하는 한편 명(明)의 복색제도를 습용하고 몽고 복장을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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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8-06 고려사(1451)
원수들이 부대를 동원해 대궐을 지키면서 우왕더러 강화부로 갈 것을 요구했다. 우왕이 어쩔 수 없이 대궐을 나와 채찍을 잡고 안장에 올라, “오늘은 벌써 날이 저물었다.” 고 말하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 엎드려 눈물을 흘릴 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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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8-06 고려사(1451)
당시 명(明)에서는 우왕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고려 정벌에 나서기 위해 황제가 친히 종묘에서 점을 치려고 사흘 동안 재계를 하다가 회군 소식을 접하고는 바로 재계를 중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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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8-08 명사(1739)
고려의 천호 진경이 내항하며 말하기를, “올해 4월, 우(禑)가 요동을 침범하기 위하여 도군상 최영과 이성계로 하여금 서경에 군대를 집결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성계는 진경으로 하여금 애주에 주둔하도록 했으나, 군량이 이어지지 않아 군대를 후퇴시키고 말았습니다. 왕이 노하여 성계의 아들을 죽이니, 성계는 군대를 돌려 왕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왕과 최영을 가두어 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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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8-10 명사(1739)
우(禑)가 그의 아들 창(昌)에게 양위할 것을 청원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앞서 그 왕이 유인되었다고 들었다. 이것은 성계의 책략이 분명하니 잠시 기다리며 그들의 동정을 살피기로 하겠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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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39 명사
고려에서 국서를 보내, 요동의 문 · 고 · 화 · 정 등의 주는 모두 고려의 옛 영토이므로 철령에 군영을 설치해서 지키겠다고 주청했다. 이원명은 “그 몇 주는 모두 원의 옛 판도에 들어 있어서 요동에 속해 있고,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을 한계로 하고 있으며 지금 이미 철령위를 설치했는데 다시 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다시 청함이 있자, 황제는 그 나라를 달래어 정해진 땅을 지켜 헷갈리지 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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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3 해동역사(海東繹史)
한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봉천부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되는 곳을 헤아려 보면 봉황성 근방에 이른다. 홍무 21년에 이곳에 철령위를 설치하고서 고려의 북계(北界) 지역을 떼어 여기에 예속시키려고 하다가 그 뒤에 끝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26년에 이르러서는 봉천부의 북쪽으로 철령위의 치소를 옮겼는데, 지금의 철령현이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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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3 해동역사(海東繹史)
봉천은 심양의 옛 이름이다. 홍무 21년은 1388년이고 홍무 26년은 1393년이다. 왕고의 북계는 압록강 남쪽인데, 명나라는 압록강까지는 왕고의 영토로 인정하였었다. 문제는 명나라가 철령을 압록강 이남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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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4-15 복기대
"대부분의 역사책에는 철령위 자리를 오늘날 함경도 원산만 일대로 설명하고 있는데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해 공격에 나선 이성계는 함경도가 아니라 중국 요동으로 향했다. 이 모순을 발견하고 중국 지리 역사서를 확인한 결과 철령위의 위치를 랴오닝 성 번시 시 부근으로 새로 설정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 국경선은 한반도 안쪽이 아닌 북으로는 멀리 선춘령이었고 서쪽으로는 중국 요동지역이었다는 것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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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4-15 복기대의 오류
(1) 다툼이 생기게 된 지역과 그것으로 인해 전쟁이 벌어지는 지역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곳을 공격해야지, 이미 차지하고 있는 곳을 공격할 필요는 없다. (2) 명나라가 설치한 철령위는 철령에 있지 않은 것이 맞다. 그렇다고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한 곳이 왕씨고려의 영역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나라는 처음에 옥저에 현도군의 치소를 두었다가 구려 서북쪽으로 옮긴 바 있고, 당나라도 처음에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가 요동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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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통지(盛京通志)
철령현은 周와 秦 때 숙신씨 지역이며 漢과 晉 때에는 읍루국 지역이고 隋 때에는 월희말갈 지역이었다. 唐 때에는 발해 대씨가 월희말갈의 땅을 취하여 부주라고 고치고 회원부에 속하게 하였다. 金과 元 때에는 함평부였다. 明 때에는 철령위로 고쳤다. 옛날에는 철령성이 칠령위의 치소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되는 곳에 있어서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1388년에 철령위를 그곳에 설치하였다가 1393년에 이곳으로 옮기고서는 그대로 철령위라고 하였다.
http://qindex.info/i.php?f=5647#2339
 
 성경통지(盛京通志)
철령이 숙신, 읍루, 월희말갈 또는 회원부였다는 부분은 잘못되었다. 그들 지역은 두만강 너머 먼 곳에 있었다. 이 성경통지의 기록과 고려사 1388년 3월의 기록을 통해, 철령성은 압록강 북쪽에 있었고 명나라가 처음 철령위를 설치한 곳도 이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나라는 처음에 이곳에서 철령 이북을 통치하려 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철령위는 옛 금나라와 원나라의 함평부가 있던 곳으로 옮겨졌고 철령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되었다. 그 ...
http://qindex.info/i.php?f=5647#5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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