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0 廣開土王陵碑(414)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加羅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나는 加羅 표기다. 뒤에 安羅 관련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으므로 여기서의 加羅는 낙동강 하류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때까디 지도 加羅와 南加羅는 분리되어 표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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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0 광개토왕릉비(414)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國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 ▨▨▨▨朝貢 옛적에는 신라 매금이 몸소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을 한 일이 없었는데,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매금이 조공하였다. ▶자신들의 우두머리는 王이라 칭하고 신라의 우두머리는 寐錦이라 칭했다. 백제의 우두머리는 百殘主라 칭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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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❷ 대응 기록이 없는 것은 문제가 안된다.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지만 한 사료에만 나오고 다른 사료에는 대응하는 기록이 없는 경우가 있다. '369년에 왜가 백제와 함께 한국 남부를 공략해서 나눠가졌다'는 일본서기 기록과 '396년에 고려가 백제를 침공하여 58성을 받아갔다'는 광개토왕릉비 기록 그리고 '400년에 고려가 5만의 군대를 보내어 신라를 점령한 왜를 쫓아냈다'는 광개토왕릉비 기록이 대표적이다.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면 일본서기 또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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