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41 ~ 0544 ◾任那² 재건 시도
任那²의 㖨己呑, 南加羅 그리고 卓淳이 신라에 넘어가자, 왜는 529년에 모야신을 任那²에 파견하여 통치기구를 설치하고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잠잠하다 흠명천황이 즉위 이듬해인 541년부터 다시 시도하는데, 이번에는 백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日本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任那² 여러 나라의 우두머리를 旱岐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그러나 545년 이후 지지부진하다 554년 이후에는 日本府와 旱岐가 기록에서 모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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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41 ~ 0554 旱岐(27/30)
❶ 旱岐는 처음에 干岐처럼 이름에 붙여 썼었다.
┆325 微叱旱岐┆366 卓淳王 末錦旱岐┆382 加羅國王 己本旱岐
❷ 그러나 541년부터는 임나에 속한 나라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래서 卓淳王은 卓淳旱岐가 되었다.
┆安羅次旱岐┆卒麻旱岐┆散半奚旱岐┆多羅下旱岐┆斯二岐旱岐┆子他旱岐(2)┆任那旱岐(8)┆卓淳旱岐┆阿鹵旱岐┆㖨國之函跛旱岐(2)┆安羅下旱岐┆久嵯旱岐┆旱岐(6)
❸ 554년을 끝으로 旱岐는 일본서기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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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41~0544 ◾任那² 재건 시도
任那²의 㖨己呑, 南加羅 그리고 卓淳이 신라에 넘어가자, 왜는 529년에 모야신을 任那²에 파견하여 통치기구를 설치하고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잠잠하다 흠명천황이 즉위 이듬해인 541년부터 다시 시도하는데, 이번에는 백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日本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任那² 여러 나라의 우두머리를 旱岐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그러나 545년 이후 지지부진하다 554년 이후에는 日本府와 旱岐가 기록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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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41~0544 ◾任那² 재건 시도
任那²의 㖨己呑, 南加羅 그리고 卓淳이 신라에 넘어가자, 왜는 529년에 모야신을 任那²에 파견하여 통치기구를 설치하고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잠잠하다 흠명천황이 즉위 이듬해인 541년부터 다시 시도하는데, 이번에는 백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日本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任那² 여러 나라의 우두머리를 旱岐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그러나 545년 이후 지지부진하다 554년 이후에는 日本府와 旱岐가 기록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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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41~0544 ◾任那² 재건 시도
任那²의 㖨己呑, 南加羅 그리고 卓淳이 신라에 넘어가자, 왜는 529년에 모야신을 任那²에 파견하여 통치기구를 설치하고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잠잠하다 흠명천황이 즉위 이듬해인 541년부터 다시 시도하는데, 이번에는 백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日本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任那² 여러 나라의 우두머리를 旱岐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그러나 545년 이후 지지부진하다 554년 이후에는 日本府와 旱岐가 기록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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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50.04.01 ◾移那斯(延那斯)·麻都
542년 7월에 성왕은 임나의 移那斯와 麻都를 본거지로 보내달라는 표를 올렸다.┆543년 11월에 천황은 임나를 재건하면 移那斯와 麻都는 저절로 물러갈 것이라고 하였다.┆544년 3월에 성왕은 移那斯와 麻都를 비난하는 표를 다시 올렸으나 10월에 내려진 조서에는 두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549년 6월에 천황은 延那斯와 麻都가 고려와 내통했는지 조사하겠다고 말했다.┆550년 4월에 성왕은 延那斯와 麻都 문제는 천황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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