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4. 任那史

임나의 역사는,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함께 삼한의 7국과 4읍을 점령한 때로부터 시작해서, 신라에 병합되어 사라지기까지 170년의 역사다.
 
영산 복강 동조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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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복강 동조 현상
고고학적 양상을 보면 영산과 복강은 선사시대부터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시대에는 영산이 임나의 역사에서 빠져있고 복강도 대화왜의 역사에서 비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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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那의 세 가지 의미
임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광개토왕릉비(414)다. 400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일본서기(720)에는 아래의 기록이 임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BC 33 任那國遣蘇那曷叱知令朝貢也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보내어 조공했다. 任那者去筑紫國二千餘里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리 북쪽에 있는데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남서쪽에 있다. 여기서의 임나는 이어지는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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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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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0033 일본서기(720)
任那國遣蘇那曷叱知令朝貢也 任那者去筑紫國二千餘里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 리 북쪽에 있는데 (축자국과는) 바다로 막혀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 北阻海의 주어를 임나로 보고 '임나의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다'라고 해석해야 하나, 그렇게 하면 일본서기의 다른 기록들과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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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ᑀ 삼국지(三國志 289)
● 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삼고 남쪽은 倭와 접해 있다. 마한, 진한 그리고 弁韓 세 종족이 있다. 진한과 변한은 모두 24국인데 이 중 열 두 나라는 진왕에게 소속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사람을 앉혀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으며 스스로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변한의 독로국은 倭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변한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韓, 濊 그리고 倭의 사람들이 모두 와서 사 가며 낙랑과 대방에도 공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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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ᑀ 삼국지(三國志 289)
● 대방에서 倭에 가려면 해안을 따라 한국을 지나 남쪽으로 간 다음 다시 동쪽으로 가면 북쪽 해안에 있는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는데 거기에서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에 도착한다. 이 시기에 倭는 30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중 야마대국은 7만여 호나 되었다. 韓이 78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마한이 10여만 호고 변진이 4-5만 호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倭가 韓보다 규모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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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0-0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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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0~0390 三韓의 재편
중국에서 진나라(司馬晋)가 중원에서 밀려나면서 한반도도 재편되었다. 낙랑과 대방이 고려에 흡수되고 백제와 신라가 성장하여 각각 마한과 진한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변한과 마한의 차령 이남은 미처 고대왕국으로 발전하기 전에 倭의 지배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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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0-10-03 일본서기(720)
화이진에서 출발했다. 이 때 바람의 신은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의 신은 파도를 일으켰으며 바다 속의 큰 고기가 모두 떠올라 배를 도왔다. 신라왕이 이를 보고 흰 끈을 목에 걸어 항복하였다. 고려와 백제 두 나라 국왕도 스스로 군영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조공을 서약하였다. ● 이때는 신라만을 복속시킨 것으로 보이며 임나에 대한 지배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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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6 ●卓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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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왜의 한국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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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광개토왕릉비(414)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백잔과 신라는 옛부터 고려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그런데 왜가 391년에 ▨을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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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일본서기(720)
왜의 황전별과 녹아별이 탁순에 이르러 사백과 개로를 백제에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다. 백제의 목라근자와 사사노궤가 오자 함께 신라를 치고 7국을 평정하였다. 서쪽으로 가 고해진에 이르러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초고와 귀수가 왔는데 이때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초고는 의류촌에서 왜군을 전송하고 천웅장언과 함께 백제의 벽지산과 고사산에 차례로 올라 맹세하고 도읍으로 돌아와 대접한 뒤 구저를 딸려 천웅장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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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古奚津 ●忱彌多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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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七國
●比自㶱 ●南加羅 ●㖨國 ●安羅 ●多羅 ●卓淳 ●加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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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四邑
●比利 ●辟中 ●布彌支 ●半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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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연도 조정
이 사건은 엄청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기록에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일본서기가 없던 사건을 만들어 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니, 이 사건도 있기는 있었을 것이다. 이 기록과 가장 근접한 것은 광개토왕릉비의 391년조 기록이다. 그래서 신공황후 49년의 기록을 391년에 일어난 것으로 설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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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왜와 백제의 영토 분할
왜와 백제는 동쪽의 7국을 왜가 갖고 서쪽의 침미다례 및 4읍은 백제가 갖기로 합의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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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 광개토왕릉비(414)
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跪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 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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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 광개토왕릉비(414)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을 토벌하였다. 백잔이 항복하지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그 성을 압박하였다. 그리고 곧 그 성을 에워쌌다. 이에 백잔주가 곤란해져 남녀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무릎을 꿇고 영원히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얻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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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7 일본서기(720)
百濟人來朝 百濟記云 阿花王立無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及峴南支侵谷那東韓之地 是以遣王子直支于天朝以脩先王之好也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백제기에는,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지침·곡나·동한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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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7 ●峴南 ●支侵 ●谷那 ●東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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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7¦왜의 영토 회수
전년에 있었던 패전이 매우 실망스러웠기 때문에 침미다례 및 현남·지침·곡나·동한의 땅을 빼앗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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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0 광개토왕릉비(414)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安羅人) 수병 … 신라성 ...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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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0¦任那
이즈음에는 변한지역이 임나(任那)로 불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나는 광개토왕릉비(414) 뿐만 아니라 송서(488), 남제서(537), 양서(636), 남사(659), 일본서기(720), 봉림사진경대사비(924), 삼국사기(1145) 등 광범위한 기록에 등장한다. 이에 비해 가야(加耶)는 삼국사기 이전의 기록에서 사용된 예를 아직 보지 못했다. 여기서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의 모형을 따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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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3 일본서기(720)
궁월군이 백제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은 우리나라 120현의 인부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갈성습진언을 파견하여 궁월의 인부를 가라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습진언(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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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 이덕일의 전라도 왜
가운데 그림은 전라도에 왜가 있었다는 이덕일의 가설이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왜가 391년에 바다를 건너왔고 399년에는 신라를 점령한 상태였으며 400년에는 그 신라 점령군이 고려에 쫓겨 임나가라로 퇴각하였고 404년에는 대방을 침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한반도에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설정해야 자연스러우며 그 주둔지로는 전라도 외에 마땅한 장소가 없다. 이덕일의 가설은 그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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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02~08 일본서기(720)
백제의 아화왕이 죽었다. 천황은 직지왕을 불러,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동한의 땅을 주어 보냈다. 동한은 감라성·고난성·이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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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08(<-285) 일본서기(720)
평군목토숙니·적호전숙니를 가라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조를 내려, “습진언(襲津彦)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틀림없이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고 하였다. 이에 목토숙니 등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신라의 국경에 다다르자, 신라왕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자복하였다. 그래서 궁월의 인부를 거느리고 습진언과 함께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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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습진언의 고립
이 사건은 일본 열도에서 바다 건너 한국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왜인이 상주하며 한반도 남부의 여러 나라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기구를 한국에 설치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국사(任那國司)나 일본부(日本府)는 그러한 필요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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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3 일본서기(720)
길비상도신 전협은 궁중에서 시종하고 있었는데 큰 소리로 친구들에게 치원에 대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미인들 중에서 내 아내만한 이가 없다. 빼어나게 아름다워 온갖 좋은 점을 갖추었고 환히 빛나고 온화하여 여러 가지 좋은 용모를 구비하였다. 화장도 필요 없으며 향수를 바를 것까지도 없다. 넓은 세상에서 견줄 만한 이가 드무니 이 시대에 홀로 빼어난 사람이다" (웅략)천황이 귀를 기울여 멀리서 듣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天皇 傾耳遙聽 而心悅焉).  곧 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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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3¦전협과 제군의 반란
이 사건은 한반도 남부를 통제할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가 오히려 왜(倭)에 대한 반란의 근거지로 이용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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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4-02 일본서기(720)
웅략천황이 즉위한 때부터 이 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은 천황의 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며 공물을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8년째가 된다. 그리고는 중국(倭)의 마음을 몹시 두려워하여 고려와 우호를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려왕이 날랜 병사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켜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고려 군사 한 사람이 말미를 얻어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신라 사람을 말몰이로 삼았는데 돌아보면서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게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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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4¦신라 구원
이 기록에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당시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에는 399년에 신라가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이듬해에 고려가 구원병을 보내 왜(倭)를 격퇴시켜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사건과는 고려와 왜(倭)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이다. 또 신라 내에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별로 어색한 것이 아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418년에 박제상이 미사흔을 구하러 왜(倭)에 갔을 때 고려군이 신라의 국경 바깥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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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5-0561 百濟의 남하
백제가 고려에 의해 한성에서 밀려나 차령 이남으로 내려오자 기존의 임나 소국들을 잠식해 들어가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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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 久麻那利
구마나리는 그 북쪽에 있는 차령과 함께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 구마나리가 하치리의 별읍이었다고 하니 하치리는 구마나리 남쪽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치리는 그 이름으로 보아 하치리의 상류에 있었을 것이다. 한편, 중원고려비에는 고모루성이 나오는데, 이것으로 보아 고모루성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다. 그 고모루성 또한 모루성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고, 그 모루가 구마나리에서 멀지 않았다고 하니, 모루를 구마나리와 중원고려비 사이로 설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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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 일본서기(720)
천황이 백제가 고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구마나리를 문주왕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백제국은 비록 거의 망해 창하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다. 일본구기에서는 “구마나리를 말다왕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의 하치호리현의 별읍이다. ●久麻那利者任那國下哆呼唎縣之別邑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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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7 일본서기(720)
이 해 기생반숙니가 임나를 점거하고 고려와 교통하였으며, 서쪽에서 장차 삼한의 왕노릇하려고 관부를 정비하고 스스로 신성이라고 칭하였다. 임나의 좌로·나기타갑배 등이 계책을 써서 백제의 적막이해를 이림에서 죽이고(爾林은 고려의 땅이다) 帶山城을 쌓아 동쪽 길을 막고 지켰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다. 백제의 왕이 크게 화가 나, 령군 고이해·내두 막고해 등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대산성에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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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四縣 분쟁
백제는 왜국에 임나 4현의 할양을 요청하였고 왜국은 이를 수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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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四縣
●上哆唎 ●下多唎 ●娑陀 ●牟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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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己汶 분쟁
백제는 513년에 가라가 점유하고 있던 기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왜는 백제의 손을 들어주었고 가라는 이에 반발하여 신라를 공격하고 일전을 준비하였다. 왜군이 가라를 침공하였으나 패하였고 백제의 장수는 신라로부터 나아가 가라를 공격하였다. 결국 기문은 백제가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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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己汶 분쟁 직후
백제는 새로 획득한 4현과 상기문을 추가해서 영토를 22담로로 묶었다. 이때의 영토는 훗날의 신라 웅주와 전주를 합한 것과 같다. 영산 지역은 신라 무주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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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영산 마한
양직공도(梁職貢圖 526-539)에는 백제가 521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신을 소개했는데, 지방을 22담로로 나누어 통치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660년에 백제가 망할 때는 지방에 37군이 있었다. 한국통일 이후 신라는 옛 백제 지역을 웅주, 전주 그리고 무주로 나누고 각각 13개, 10개 그리고 14개의 군을 두었다. 모두 합하면 37개로 백제가 망할 때의 군과 숫자가 같다. 웅주와 전주만 놓고 보면 23개의 군으로 양직공도에 나오는 담로와 숫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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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양직공도(梁職貢圖)
所治城曰固麻謂邑曰檐魯如中國郡縣有二十二檐魯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叛波卓多羅前羅斯羅止迷麻連上己文下枕羅等附之 다스리는 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처럼 22담로가 있다. 자제와 종친들에게 나눠주었다. 주변에는 소국이 있는데 반파·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련·상기문·하탐라 등이 부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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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百濟 旁小國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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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근강모야신의 실패
527년 왜(倭)는 근강모야신으로 하여금 6만의 군사를 이끌고 임나에 나아가 남가라와 녹기탄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게 하려 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 축자국조 반정이 방해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축자는 오늘날의 구주 북부에 있던 나라로 일본 열도의 관문과 같은 곳이었다.  529년 왜(倭)는 다시 모야신을 안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이 문제의 해결을 맡겼다. 모야신은 안라에 큰 당을 세워 백제와 신라의 사신을 불러 칙을 전했다. 임나왕 아리사등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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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근강모야신의 실패
여기서 임나에 대한 왜(倭)의 개입이 어떤 양상이었는지 대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임나에는 '한기'라고 불리는 여러 왕들이 있었고 그들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아 임나의 여러 나라는 기본적으로 여느 왕국과 다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왜(倭)가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임나의 여러 나라와 주변의 왕국 사이에서 질서를 주도하였는데 이 점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임나와 왜(倭)는 바다로 갈라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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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多沙津 분쟁
가라에는 倭로 건너가기에 좋은 다사진이라는 나루터가 있었다. 백제가 이 진을 탐내자 倭가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반발한 가라는 신라와 가까워졌고 마침내 가라왕은 신라의 왕녀와 혼인까지 하였다. 신라는 이것을 기회로 가라의 일부 영토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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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四村
●金官 ●背伐 ●安多 ●委陀 (●多多羅 ●須那羅 ●和多 ●費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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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일본서기(720)
任那王己能末多干岐來朝言 임나왕 기능말다한기가 와서 조회하였다(기능말다란 대개 아리사등이다). 대반대련금촌에게 아뢰기를 “바다 밖의 여러 번국들은 태중천황이 내관가를 두었을 때부터 본토를 저버리지 않았으므로 그 땅을 봉하였는데 그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라는 원래 내려주었던 경계를 어기고 자주 경계를 넘어 침략해 오니 청컨대 천황께 아뢰어 신의 나라를 구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여기서의 임나왕은 가라왕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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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백제의 팽창
임나에 설치한 기구를 통해 이루어지던 倭의 간섭은 이후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모야신의 실패로 임나에 설치한 통치기구에 대해 회의가 들었으며 둘째, 백제 편향으로 인해 임나의 倭에 대한 거부감이 커져갔으며 셋째, 백제가 다사진을 확보하여 사신교환의 용이한 통로가 확보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백제는 倭를 이용하여 임나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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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 ●下韓(南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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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4 일본서기(720)
안라의 차한기 이탄해, 대불손, 구취유리 등과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 졸마의 한기, 산반해의 한기의 아들, 다라의 하한기 이타, 사이기의 한기의 아들, 자타의 한기 등이 임나 일본부의 길비신과 더불어 백제에 가서 함께 조칙을 들었다. 백제의 성왕이 임나의 한기들에게,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더불어 힘을 다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천황에게 의지하면 임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기뻐하며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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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7 일본서기(720)
백제는 안라의 일본부가 신라와 더불어 계책을 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 나솔 비리막고, 나솔 선문, 중부 나솔 목리미순, 기신 나솔 미마사 등을 보내 안라에 가서 신라에 온 임나의 집사를 불러 임나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안라 일본부의 하내직이 신라와 공모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 그리고 왕은 임나에게, “경(卿) 등이 번번이 감언을 믿고 경솔하게 거짓말에 속아서 임나국을 멸하고 천황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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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5-09 일본서기(720)
백제가 중부 호덕 보제 등을 임나에 사신으로 보내어 오(吳, 중국 남조를 가리킨다)나라의 재화를 일본부의 신하와 여러 한기에게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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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8 馬津城 전투
백제가 중부간솔 약엽례 등을 보내어 "마진성(馬津城)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가 ‘안라국과 일본부가 불러 들여 벌줄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사정으로 미루어 상황을 보더라도 진실로 서로 비슷합니다."라고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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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1~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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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1~0554
백제가 임나와 함께 고려를 침공하여 한성을 되찾고 더 진군하여 평양까지 차지하였다. 신라도 고려를 침공하여 10군을 빼앗았다. 돌궐의 침공까지 받아 위기에 처한 고려는 신라와 손을 잡았다. 그러자 백제는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고, 한성은 신라가 차지하였다. 이어서 백제와 고려는 서로 공격을 주고 받았다. 다시 백제는 왜의 지원을 받아 가라와 함께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크게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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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 신라, 임나 병합
562년 신라는 임나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에 격분한 왜(倭)는 대장군 기남마려숙녜와 부장군 하변신 경부를 보내어 각각 치리와 거증산으로부터 출동하여 신라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도 군사를 모아 대응하였으나 패하고 만다. 이에 기남마려숙녜는 백제로 돌아갔으나 하변신 경부는 이곳 저곳을 다니며 성들을 함락시키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다 한때 실수를 하는 바람에 신라군에 패하고 따라간 부인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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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任那 十國
新羅打滅任那官家 一本云廿一年任那滅焉 總言任那 別言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散半下國 ●乞湌國 ●稔禮國 合十國 신라가 임나관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어떤 책에서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찬국, 염례국 등 모두 열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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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1-03 일본서기(720)
遣坂田耳子郞君 使於新羅 問任那滅由 반전이자랑군을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임나를 멸망시킨 사유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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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1-04 일본서기(720)
天皇寢疾不豫 皇太子向外不在 驛馬召到 引入臥內 執其手詔曰 朕疾甚 以後事屬汝 汝須打新羅 封建任那 更造夫婦 惟如舊日 死無恨之 천황이 병환으로 자리에 누웠다. 황태자는 밖에 나가 없었으므로 역마로 불러들였다. 누워 있는 내전에 불려 들어가니, 그의 손을 잡고 명하기를 “내 병이 심하니 이후의 일을 너에게 맡긴다. 너는 반드시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 봉하라. 다시 서로 화합하여 옛날과 같이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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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1793 이덕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위신공황후(僞神功皇后)가 무내 숙녜(武內宿禰)를 거느리고 악포(鰐浦)로부터 신라를 습격하였는데, ... 49년에 신라가 오래 통신(通信)하지 않으므로, 황전별(荒田別)과 녹향별(鹿香別)을 장군(將軍)으로 삼고 백제의 구저(久氐) 등을 길잡이로 삼아 신라를 격파하고, ... 임나왕(任那王)을 궁창(宮倉)으로 삼고 7국ㆍ4읍을 임나에 붙여 궁장(宮藏)으로 삼았다. ● 일본서기의 이야기를 옮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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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5-1864 한치윤, 해동역사(海東繹史)
신공황후 49년에 신라가 오랫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자 황전별(荒田別) 및 녹아별(鹿我別)을 장군으로 삼고 백제 사람인 구저(久氐) 등을 향도(鄕導)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여 ... 韓國의 궁창(宮倉)을 정하여 임나(任那)의 왕을 궁창수(宮倉首)로 삼은 다음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 7국과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등 네 개의 큰 고을을 임나에 붙여서 궁장(宮藏)으로 삼게 하였다. ● 일본서기의 이야기를 옮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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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동국사략
대가야는 또한 任那라고도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344년 전에 新羅 眞興王이 그 땅을 멸하고 대가야군을 설치하였다. 대가야가 예전에 蘇那葛叱知를 日本에 파견하여 화친을 맺고 또 왕자 阿羅斯 등이 일본에 갔다. 그 나라에 南伽耶(소가야) 등 7국이 속하니 총칭하여 임나라 하였다. 대체로 가락과 임나는 하나의 부락이었다. 국력이 미약하여 신라, 百濟, 일본의 견제를 받았다. ● はやし たいすけ가 쓴 역사책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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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심상소학국사
임나의 여러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를 정벌하고 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였다. 신라, 고구려, 백제는 모두 일본에 조공을 바쳤으며 신라와 백제는 또 일본에 볼모를 두어 그 진심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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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고등학교 교과서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의 백제는 마한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또,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 영산강 유역의 고고학적 양상에서 백제의 영향이 나타나는 시기는 6세기부터다. 그리고 낙동강 유역의 소국에 지배권을 행사했다고 기록에 나오는 나라는 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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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고등학교 교과서
가야 연맹도 5세기 초에 크게 변하였다.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되면서 김해, 창원을 중심으로 하는 남동부 지역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그 동안 낙후 지역이었던 북부 지역의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등지의 세력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5세기 후반에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새로운 맹주로 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이룩하였다. ● 가야보다 가라가 더 보편적인 명칭이다. 고령에는 가라가 있었고 김해에는 남가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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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 양상
기록을 통해 추정한 임나의 범위와 고고학적 양상으로 나타나는 임나의 범위는 모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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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 양상
가라계   독널무덤   왜계   전방후원분   한반도 출토 왜계 갑주(倭係 甲冑)의 분포와 의미  
 
기타
용어별   임나 지도 비교   임나경영설 설문  
 
¦임나경영설 Quick Proof
흔히 임나경영설은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이야기로 알고 있는데, 한국과 고려 그리고 중국의 기록에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일본에서도 이제 임나경영설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본 교과서에는 여전히 임나경영설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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