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5.01 高麗史(1451)
是月 生女眞完顔阿骨打稱皇帝 更名旻 國號金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이름을 민이라 고치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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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5.01 高麗史(1451) 1
是月 生女眞完顔阿骨打稱皇帝 更名旻 國號金 이달에 생여진의 완안아골타가 황제를 칭하면서 이름을 민이라 고치고 국호를 금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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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5.01 高麗史(1451) 2
그 풍속은 흉노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는 성곽이 없고 산과 들에 흩어져 살았다. 문자가 없어서 말과 노끈으로 매듭을 지은 것으로 약속을 하였다. 그 지역에는 돼지·양·소·말 등이 풍부하고 준마가 많은데, 그 중에는 하루에 1,000리를 달리는 말도 있었다. 사람들은 사납고 용맹하여 어려서는 활로 새나 쥐 등을 쏘아 잡다가 커서는 활시위를 당기고 말을 달리면서 싸움을 익혀 강한 병사가 되지 않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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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5.01 高麗史(1451) 3
모든 부락이 각자 우두머리라고 생각하는 탓에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지역은 서쪽으로는 거란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우리 국경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거란과 우리 조정을 섬겨 왔다. 내조할 때마다 사금·담비 가죽·좋은 말 등을 예물로 가져왔고, 우리 조정에서도 역시 은폐를 후하게 주었는데 해마다 항상 이렇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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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5.01 高麗史(1451) 4
或曰 昔我平州僧今俊 遁入女眞 居阿之古村 是謂金之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 우리 평주의 승려 금준이 여진으로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에서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금의 선조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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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5.01 高麗史(1451) 5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 初入女眞阿之古村 娶女眞女 生子曰古乙太師 古乙生活羅太師 活羅多子 長曰劾里鉢 季曰盈歌 盈歌最雄傑 得衆心 盈歌死 劾里鉢長子烏雅束嗣位 烏雅束卒 弟阿骨打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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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5.01 高麗史(1451) 5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김극수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서 여진의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이름을 고을태사라 하였다. 고을태사가 활라태사를 낳았고, 활라태사는 아들을 많이 두었다. 장남이 핵리발이고 막내아들은 영가였는데, 영가가 지혜와 용맹이 가장 빼어나 민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남 오아속이 지위를 계승하였고, 오아속이 죽자 그 동생 아골타가 그 자리에 올랐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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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1 高麗史
活羅多子 長曰劾里鉢 季曰盈歌(영가) 盈歌最雄傑 得衆心 활라태사는 아들을 많이 두었다. 장남이 핵리발이고 막내아들은 영가였는데 영가가 지혜와 용맹이 가장 빼어나 민심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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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1 高麗史
盈歌死 劾里鉢長子烏雅束(오아속)嗣位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남 오아속이 지위를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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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1 高麗史
烏雅束卒 弟阿骨打(아골타)立 오아속이 죽자 그 동생 아골타가 그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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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1 高麗史
活羅(활라)多子 長曰劾里鉢 季曰盈歌 盈歌最雄傑 得衆心 활라태사는 아들을 많이 두었다. 장남이 핵리발이고 막내아들은 영가였는데 영가가 지혜와 용맹이 가장 빼어나 민심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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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1 高麗史
活羅多子 長曰劾里鉢(핵리발) 季曰盈歌 盈歌最雄傑 得衆心 활라태사는 아들을 많이 두었다. 장남이 핵리발이고 막내아들은 영가였는데 영가가 지혜와 용맹이 가장 빼어나 민심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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