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0023 「三國誤記」 三國志·魏略
20~23년에 염사착이 마한의 우거수가 되어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하였다. 살던 부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은 韓人의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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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06 三國志·魏略(265)
일찍이 우거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에 조공하는 번국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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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06 三國誤記 三國志·魏略
20~23년에 염사착이 마한의 우거수가 되어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하였다. 살던 부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은 韓人의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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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06 三國志·魏略(265) 02
물으니 남자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漢 사람으로 이름은 호래이다. 우리들 천 5백 명은 재목을 벌채하다가 韓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우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 고 하였다. 鑡이 “나는 漢의 낙랑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 하니, 호래는, “좋다.” 하였다. 그리하여 鑡은 호래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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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06 三國志·魏略(265) 03
함자현에서 郡에 연락을 하자, 郡은 鑡을 통역으로 삼아 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가서 호래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함께 항복한 무리 천여명을 얻었는데, 다른 5백명은 벌써 죽은 뒤였다. 鑡이 이때 진한에게 따지기를, “너희는 5백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만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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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45 06 三國志·魏略(265) 04
진한은 “5백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습니다.” 하고는, 진한 사람 만 5천명과 변한포 만 5천필을 내어놓았다. 鑡은 그것을 거두어 가지고 곧바로 돌아갔다. 郡에서는 鑡의 공과 의를 표창하고, 관책과 전택을 주었다. 그의 자손은 여러 대를 지나 125년에 이르러서는 그로 인하여 부역을 면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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