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1.10 「三國誤記」 ❼國內
百濟王卛兵三萬 來攻平壤²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葬于故國之原 백제 근초고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²성을 공격해 왔다. 고국원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遷都於國内 국내로 도읍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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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71.10 三國史記(1145) 高句麗
百濟王卛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葬于故國之原 백제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고국원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百濟蓋鹵王表魏曰 梟斬釗首 過辭也 백제 개로왕이 위에 표를 보내어 말하기를, “쇠의 머리를 베어 매달았다.”라고 하였는데 지나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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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71.10 ◾平壤城
한강 유역에 있는 백제가 대동강과 청천강을 넘어 고려를 공격하기는 어려워 보이므로 이 平壤城이 있을 곳으로는 대동강 유역이 어울린다. 그리고 왕이 전사한 것으로 보아 당시는 이곳이 도읍이었을 것이다. 343년에 도읍을 平壤 동쪽의 黄城으로 옮긴다는 기록 이후 또 다른 천도 기록이 없으므로 이 平壤城은 동쪽에 黄城이 있었다는 그때 그 平壤에 있는 城이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343년에 도읍을 옮긴 平壤은 대동강 유역에 있는 平壤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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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71.10 ◾故國之原
故國之原 또는 故國原은 故國川原이나 國壤과 같은 곳인 듯하다. 故國川王 또는 國襄王은 國內에 도읍이 있던 시기의 왕이므로 故國原 또한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平壤²에서 백제에게 패하면서 도읍을 다시 國內로 옮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려는 244~246년에 조위의 침공을 받자 247년에 도읍을 丸都에서 平壤¹으로 옮겼고 342년에 전연의 침공을 받자 343년에 도읍을 丸都에서 平壤²으로 옮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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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71.10 三國史記(1145)
근초고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고국원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표를 보내어 말하기를 '쇠(釗 고국원왕)의 머리를 베어 매달았다.'고 하였는데 지나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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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71.10 三國史記(1145)
百濟王卛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葬于故國之原 백제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고국원왕의 장사지는 故國之原이고 故國原은 서천왕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서천왕의 무덤은 낙랑과 대방을 병합하지 못했을 때 만들어졌다. 안악3호분은 옛 대방 지역에 있으므로 고국원왕의 무덤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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