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
해방 직후 영천군 대창면에 인민위원회, 농민조합, 치안대(치안유지대) 등의 활동이 활발했고 자양면도 사정이 비슷했다. 당시 영천군 단위의 주요인물로는 임장춘, 임재식 형제가 있었고 영천 북부지역의 주요인물로는 황보집이, 남부지역의 주요인물로는 조규선, 조규용, 조규인 형제와 한석헌 등이 있었다. 자양면 치안유지대의 경우 20대 초반의 청년 20여 명이 구성하였고 그들의 활동은 면 단위로 지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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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0.01¦이만섭
이전에도 대륜중학교와 대구상업학교 등에서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연합시위가 잦았다. 10월 1일에도 학생들이 연합시위를 하며 대구경찰서를 점거하였다. 당시 대륜중학교의 경우 이만섭의 주도로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였다. ※이만섭은 1950년에 대륜중학교를 졸업하였다. 516이후 박정희에 의해 발탁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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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0.02 신동 지천 약목
2일 밤 대구에서 온 시위대 40여 명이 신동지서와 지천지서를 습격하여 파괴했으며, 약목에서는 군중 500여 명이 약목지서를 습격하여 3명의 경찰을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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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0.03
칠곡의 봉기는 약목에서 시작하였다. 이후 주민들은 칠곡 외곽지를 돌아 당시 칠곡 중심가인 왜관읍에 위치한 칠곡경찰서로 몰려가 최팔용을 자체 경찰서장으로 뽑고 경찰서를 점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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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0.03 01:00
오전 1시경 수만 명의 주민들이 일제히 봉기해 읍내를 포위하여 통신망을 절단하고 군청, 경찰서, 우편국, 재판소, 등기소, 신한공사출장소 등과 지서,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고 불태웠다. 40여 명의 경찰이 무장 해제되거나 납치되었으며 관리들도 다수 살해되고, 군수 이태수도 살해되었으며 한민당의 요인이자 영천의 대지주였던 이인석의 집도 공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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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0.03 06:00 왜관
약목에서 출발한 군중들은 중간에 세가 불어나 3일 오전 6시경 왜관에 이르러서는 약 2,000명이 시위행진을 하고 칠곡경찰서를 공격했다. 이 와중에 칠곡경찰서 서장 사택이 파괴되고 서장 장석한 등 6명의 경찰이 살해되었다. 주민들은 칠곡경찰서로 몰려가 경찰서를 점거했다. 이 봉기와 소요는 10월 3일 성주로부터 왜관에 도착한 충남경찰대가 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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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0.03 칠곡 인동 석적 북삼
2일과 3일 사이 밤에 왜관읍 북쪽의 교량 2개를 폭파했으며, 3일 새벽에는 칠곡, 인동, 석적, 북삼지서 등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경찰ㆍ관리ㆍ부호의 가옥을 파괴했다. 이 과정에 군중 측도 7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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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0.03+ 1
대창면에서는 한석헌을 대장으로 하는 치안대가 대창지서를 점령하였다. 자양면도 사정이 비슷하였다. 영천 북부지역의 경우 영천 북부지역의 중심지인 화북면 자천리 자천장터에 영천읍의 상인들이 트럭을 타고 들어와 선동하였으며, 이에 그 지역 농민들이 합세하여 ‘몽둥이패’가 되어 마을 단위로 돌아다니며 우익인사, 지주, 친일파 집에 불을 지르거나 가옥 파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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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0.03+ 2
화북면 소재지이자 600여 호의 주민이 거주하던 자천리의 장시에서부터 주민 봉기가 시작하여 이 지역의 또 다른 중심지인 화남면 삼창리로 연결되어 일어났다. 이외에도 신녕, 청통, 화북 등 영천의 각 면에서도 봉기가 격렬하게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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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0.03ᑀ
봉기가 진압된 후 사건 관련자들은 팔공산, 유학산으로 입산하여 빨치산이 되었다. 유학산의 빨치산 수는 많지 않았다. 홍포수라는 사람이 유명하였다. 빨치산이 활동하던 유학산 인근 마을은 경찰의 탄압대상이 되었다. 1949년 또는 1950년에 유학산 벼랑골에서 민간인 학살사건도 있었다. 이후 한국전쟁기에는 인근의 아양골에서 민간인 학살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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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0.05
대구에 주둔하던 미군과 충남경찰부대 등 지원경찰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영천에서는 12월 8일까지 600여 명이 경찰에 검거되었으며 재판에 회부된 사람 가운데 9명이 사형을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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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0.05+
외지에서 온 경찰에 의해 진압된 이후 군경과 빨치산의 대치상태가 지속되었다. 빨치산들은 봉홧불 올리기, 삐라 뿌리기, 길 끊기, 열차 탈취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경북도당유격대와의 연계가 활발했다. 구술자 최일달은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봉홧불 올리기 등에 동원되었다. 반면 구술자 이종만은 군경작전 시 현지 청년단원으로서 자주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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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군경의 진압과정에 민간인이 다수 살해되었으며, 이 지역에 들어온 서북청년단원이 민간인을 사살하거나 주민들을 집단폭행하는 사건도 자주 있었다. 이에 상당수의 청년들이 입산하여 빨치산유격대를 형성하여 군경과 빨치산의 내전에 버금가는 대치상태가 한국전쟁기까지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주민들의 피해도 막심하였다. 한국전쟁 전까지 영천지역에서 군경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은 600여 명, 한국전쟁 기간에 국민보도연맹사건 등으로 학살된 민간인도 600여 명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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