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0 高麗史(1451)
濕忽에 성을 쌓고 嘉州로 승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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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93.10 髙麗계승론의 모순
신라에서 나온 왕씨髙麗가 髙麗계승을 내세우려면 신라에 髙麗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왕씨髙麗가 편찬한 삼국사기(1145)에는 백제와 예의 땅이었던 차현과 죽령 이북의 한주, 삭주 그리고 명주를 옛 髙麗 지역이라 기술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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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18 髙麗계승론의 모순
발해가 髙麗계승국이라면 그런 발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왕씨髙麗가 내세우는 髙麗계승론은 매우 어색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왕씨髙麗가 편찬한 삼국사기(1145)에는 발해가 髙麗계승국이라는 이야기가 없고 靺鞨을 붙여 渤海靺鞨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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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70 定安國
契丹의 침공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정안국왕 오현명의 조부가 백성들을 이끌로 이주하여 세웠다. '고려의 옛 땅에 사는 발해의 유민(臣本以高麗舊壤渤海遺黎)'을 자처하였다. 정안국에 대한 왕씨고려의 지원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왕고에 의해 장백산 너머로 쫓겨난 듯하다. 정안국은 맥고려의 발상지에 고려계승국인 발해의 유민이 세웠기 때문에, 역시 고려계승을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 계승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왕고의 건국 명분을 무력화시킬 우려가 있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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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6◾ @을리골 @乙離骨
乙離骨은 왕고에 인접해 있었지만 그 동쪽과 서쪽의 여러 부족들은 완안부에 종속되었으므로 乙離骨은 왕고의 북쪽에 있었다. 완안부는 乙離骨을 거쳐 曷懶에 이르렀는데, 曷懶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었으므로 乙離骨은 개마대산의 서쪽에 있었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는 乙離骨의 위치로는 허천강 유역이 가장 적합하다. 고대에는 이곳이 西蓋馬였었다. ┆西蓋馬·蓋馬國·乙離骨·甲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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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8 高麗史(1451) 옛 옥저를 정벌했던 尹瓘의 인식
女眞 本勾高麗之部落 聚居于盖馬山東 여진은 본디 구고려의 부락으로서 개마산 동쪽에 모여 살았다. 其地方三百里 東至于大海 西北介于盖馬山 南接于長·定二州 山川之秀麗 土地之膏腴 可以居吾民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그 땅은 사방 300리로 동쪽은 대해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개마산이며 남쪽으로는 장주·정주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구고려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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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8 尹瓘
▐ 曷懶甸에 대한 묘사가 삼국지(289)에 나오는 東沃沮와 비슷하다. 沃沮가 女眞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윤관은 그들에 대해 동족 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勾高麗가 통치했던 곳이니 勾高麗를 계승한 王氏高麗가 차지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있다는 논리다. 왕조와 종족이 분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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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4.08+ ◾五水
乙離骨은 허천강 유역이니 乙離骨水는 허천강이다. 이 乙離骨에서 蓋馬大山을 넘어 동해안의 曷懶甸으로 가는 길은 크게 세 갈래가 있었다. 가장 동북쪽에 弓漢伊嶺을 넘어 曷懶水를 따라내려가 弓漢伊村으로 가는 길과 그 서남쪽의 乙離骨嶺을 넘어 活涅水(活禰水)를 따라내려가 吳林金村으로 가는 길 그리고 가장 서쪽의 蒙羅骨嶺을 넘어 三潺水를 따라내려가 三散으로 가는 길이다. 이 세 갈래의 물길에 合懶를 지나는 闢登水와 □□를 지나는 ○○○까지 합하면 五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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