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8. 요흑사 > BC 0311 ᑅ 조선
 
 선진과 진한 시기
통전(801)에는 북평에서 낙양까지 3520리고 상곡에서 낙양까지 1462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북평에서 상곡까지는 2058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통전은 상곡에서 범양까지 동으로 214리고 범양에서 어양까지 동으로 210리며 어양에서 북평까지 동으로 300리고 북평에서 유성까지 동으로 700리라고 하였다. 이렇게 계산하면 상곡에서 북평까지 724리고 유성까지 가도 1424리 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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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403 ᑀ 위략(265?) 01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 예가 말리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침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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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34 사기(BC 91)
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南有嘑沱易水地方二千餘里帯甲數十萬車六百乗騎六千匹粟支數年南有碣石鴈門之饒北有棗栗之利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此所謂天府者也 -- 索隠(戦國策)碣石山在常山九門県. 地理志大碣石山在右北平驪城県西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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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34 사기(BC 91)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이, 북쪽으로는 임호와 누번이, 서쪽으로는 운중과 구원이, 남쪽으로는 호타하와 역수가 있습니다. 땅은 사방 2천여 리에 갑옷을 두른 병사가 수십 만, 전차가 600승, 전투마가 6,000필, 비축된 식량은 몇 년을 먹을 수 있습니다. 남으로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으로는 대추와 밤이 풍족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하늘이 내려준 창고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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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34 滦河流域
연나라의 도읍 계(薊)는 오늘날의 북경 방산구다. 이곳에서 난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까지는 거리가 280km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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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34 동호를 내쫓기 전의 연나라
난하 유역을 빼면 사방 2천리의 연나라 영토가 나오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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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11 ᑅ 사기(BC 91)
北鄰烏桓夫餘東綰穢貉朝鮮真番之利 연나라는 북으로 오환 및 부여와 이웃하고 동으로 예, 맥, 조선 그리고 진번과 교류하여 이익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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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11 - 0279 사기(BC 91) 1
其後燕有賢將秦開為質於胡胡甚信之帰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 造陽 集解韋昭曰 地名在上谷 正義按 上谷郡今嬀州 -- 襄平 索隠韋昭云 今遼東所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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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11 - 0279 사기(BC 91) 1
그 후에 연나라의 명장 진개가 오랑캐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연나라로 돌아온 후,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해 패주시켰다. 이때 동호는 1천여 리나 물러갔다. 형가와 함께 진시왕을 암살하려던 진무양은 진개의 손자다. 연나라 역시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에 군을 설치하여 오랑캐를 방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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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11 - 0279 사기(BC 91) 1
원래 燕의 영토가 사방 2천리였고 난하의 동쪽에 있는 갈석을 燕의 남쪽이나 한 것을 보면, 이때 차지한 천리 땅의 동쪽 경계는 난하보다 훨씬 동쪽에 있게 된다. 이 기록에 나오는 요동과 요서는 요하를 기준으로 갈랐을 것으로 보이지만, 난하나 대릉하를 기준으로 갈랐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대릉하는 요하와 매우 가까이 있고 요하가 훨씬 크므로 대릉하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갈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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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11 - 0279 사기(BC 91) 2
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爲置吏築鄣塞 연나라가 그 전성기 때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보루과 요새를 쌓았다. -- 燕의 전성기는 昭王(BC 311 - BC 279) 때였다. 秦·楚·趙·魏·韓 등과 연합하여 강국인 齊을 치고 70여개의 성과 도읍인 임치(臨淄)까지 점령할 정도의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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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11 - 0279 燕의 조선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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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11 - 0279 염철론(BC 81)
燕襲走東胡辟地千裏度遼東而攻朝鮮 연나라가 동호를 공격하여 쫓아내고 천리의 땅을 개척했다. 또 요동을 지나 조선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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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311 - 0279 위략(265?)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燕은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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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60 戰國七雄
연나라의 수도 계(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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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22 사기(BC 91)
秦滅燕屬遼東外徼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요동 외요에 소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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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22 사기(BC 91)
요동과 조선은 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燕은 원래 사방 2천리였는데 동호를 내쫓고 천리의 땅을 차지한 뒤 요동군을 설치했다고 하므로 조선과 접한 요동 또한 북경에서 천리 이상 떨어져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요동과 요서를 가르는 기준에서 난하는 탈락하게 된다. 난하는 燕의 도읍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앞서 요동과 요서는 대릉하를 기준으로 갈랐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요동과 요서를 가르는 기준으로 남은 것은 요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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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15 사기(BC 91) 진시황본기
燕人盧生使入海還以鬼神事因奏錄圖書曰亡秦者胡也始皇乃使將軍蒙恬發兵三十萬人北擊胡略取河南地 연나라 사람 노생이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귀신에 관한 일로 보고했는데 ‘진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다’라고 쓰여 있는 참위서를 올렸다. 시황은 장군 몽염(蒙恬)에게 군사 30만 명을 내서 북방의 호를 공격하게 하여 하남 땅을 취했다. -- 集解鄭玄曰 胡胡亥秦二世名也秦見圖書不知此爲人名反備北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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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15 사기(BC 91) 몽염열전
秦已並天下乃使蒙恬將三十萬衆北逐戎狄収河南築長城因地形用制険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於是渡河拠陽山逶蛇而北暴師於外十餘年居上郡是時蒙恬威振匈奴 -- 河南 正義謂霊 勝等州 -- 臨洮 集解徐広曰 屬隴西 -- 遼東 正義遼東郡在遼水東 始皇築長城東至遼水 西南至海(之上) -- 陽山 集解徐広曰 五原西安陽県北有陰山 陰山在河南 陽山在河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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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15 사기(BC 91) 몽염열전
진이 천하를 합병하자 곧 몽염에게 30만 무리를 이끌고 북으로 융적을 내쫓고, 하남을 수습하여 장성을 쌓게 했다. 지형에 따라 험준한 곳을 통제할 수 있게 쌓았는데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에 걸쳐 있었다. 그리하여 황하를 건너 양산을 거점으로 하여 구불구불 북으로 나아갔다. 10년 넘게 군대는 외지를 전전하다 상군에 주둔하기에 이르렀고, 이 무렵 몽염의 위세는 흉노를 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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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15 사기(BC 91) 흉노열전
秦이 여섯 나라를 멸망시키고 시황제가 몽염에게 십만의 군사를 주어 북으로 胡를 치게 해 하남 땅을 모조리 손에 넣었다. 황하를 이용해 요새를 만들고 황하를 따라 44개의 현에 성을 쌓고 죄수를 이주시켜 충당하게 했다. 그리고 직도를 통하게 해 구원에서 운양에 이르렀는데 험준한 산의 능선을 국경으로 삼고 골짜기를 이용해 참호로 삼고 수선할 수 있는 것을 손보아 임조에서 요동까지 만 여리에 이르렀다. 게다가 황하를 건너 양산과 북가 사이에 근거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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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15 사기(BC 91) 흉노열전
秦滅六國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衆北擊胡悉收河南地因河爲塞築四十四縣城臨河徙適戍以充之而通直道自九原至雲陽因邊山險塹谿谷可繕者治之起臨洮至遼東萬餘里又度河據陽山北假中
http://qindex.info/i.php?f=2642#6404
 
 BC 0215 長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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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15 진장성 동단 문제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까지 장성을 쌓은 적이 있으니 진나라의 만리장성이 요동까지 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진나라의 장성이 낙랑 수성에서 시작되었다는 태강지리지의 기록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은 요동이 아니라 낙랑 수성이 되는 것이다. 사기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라 이 태강지리지의 기록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후대에 왜곡된 기록이라는 것이다.
http://qindex.info/i.php?f=2642#4362
 
 BC 0215 위략(265?)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조선왕 부가 왕이 되었는데 진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략상 진나라에 복속은 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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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10 사기(BC 91)
시황이 사구(沙丘) 평대(平臺)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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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09 삼국지(289)
진승 등이 일어나 온 천하가 秦에 반기를 드니, 燕·齊·趙의 백성 수만인이 조선으로 피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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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09 위략(265?) 03
그 뒤 20여년이 지나 陳과 項이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燕·齊·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준에게 망명하므로, 준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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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09
삼국지(289)에, 진나라 사람들이 고역을 피해 한국으로 오자 한국이 동쪽의 땅을 내어주어 살게 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 기록에 대응시킬 수 있는 사건이다.
http://qindex.info/i.php?f=2642#5843
 
 BC 0202 사기(BC 91)
漢興爲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屬燕 한나라가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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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02 사기(BC 91)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패수를 국경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연나라가 관리를 두어 보루과 요새를 쌓고 진나라가 요동외요에 소속시킨 곳이 패수 바깥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국경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패수가 요동 바깥 경계였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강은 압록강, 청천강 그리고 대동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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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202 이후 사기(史記 기원전 91)
漢興爲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屬燕 한나라가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http://qindex.info/i.php?f=2642#42000
 
 BC 0202 위략(265?) 03
漢 때에 이르러 노관으로 연왕을 삼으니, 조선과 燕은 浿水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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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95 - 0188 사기(BC 91) 02
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연왕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인을 모아 몽치 머리에 오랑캐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秦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燕과 齊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에 도읍을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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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95 - 0188 사기(BC 91) 02
패수 바깥에 있는 진나라의 옛 땅은 그 전에 연나라가 조선과 진번을 쳐서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보루와 요새를 쌓았다는 기록에 대응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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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95 - 0188 위략(265?) 04
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간 뒤, 燕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항복하였다.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준을 설득하였다. 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구슬을 하사하며, 백 리의 땅을 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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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95 - 0188 위략(265?) 05
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漢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은 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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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95 - 0188 사기(BC 91) 03
이 때는 마침 효혜·고후(BC195- BC188)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는 곧 위만을 외신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오랑캐의 군장이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이로써 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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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95 - 0188 사기(BC 91)
燕과 丹의 무리가 遼를 어지럽힐 때 만은 유민을 거두어 해동에 모아 진번에 집결시키고 변방의 외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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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95 - 0188 ᑀ 위략(265?) 06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韓씨라는 성을 사칭하였다. 준은 해외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준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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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95 - 0188 ᑀ 삼국지(289)
망명객 위만이 조선의 왕이 되면서 옥저는 모두 복속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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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28 후한서(445)
예군(濊君) 남려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 구를 이끌고 요동에 귀속하였으므로 무제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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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11 사기(史記 BC 91)
누선장군은 정예부대를 이끌고 먼저 심협을 함락시키고 석문을 깨뜨려 월나라의 배와 양식을 노획했다. 이틈에 밀고 나가 월나라의 선봉을 꺽고 수만 명을 거느리고는 복파장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복파장군은 죄수들을 인솔한 데다 길까지 멀어 약속한 날짜에 늦었고 누선장군과 만났을 때는 1000여 명뿐이었다. 두 군대는 함께 나아갔는데 누선장군이 앞장서서 먼저 번옹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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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11 사기(史記 BC 91)
위만조선을 침공하기 전에 있었던 월남 침공의 기록이다. 죄수를 동원했다는 점과 육로와 해로로 나누어 공격했다는 점에서 조선 침공과 방식이 같다. 월남 침공에서는 육로로 간 부대가 실패했지만 조선 침공에서는 해로로 간 부대가 패배했다. 한나라가 육로와 해로로 나누어 조선을 공격한 방식은 700여년 후 수나라가 고려를 공격한 방식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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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9 ᑅ 사기(BC 91) 04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漢)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천자에게 입현치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眞番旁衆國 또는 眞番旁辰國 진번 곁의 진국)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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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9 ᑅ 위략(265?) 07
일찍이 우거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에 조공하는 번국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http://qindex.info/i.php?f=2642#5830
 
 BC 0109 사기(BC 91) 05
원봉 2년에 한나라는 사신 섭하를 보내어 우거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끝내 천자의 명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며 국경인 패수에 이르르자 마부를 시켜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 장을 찔러 죽이고 바로 건너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천자가 꾸짖지 않고 하에게 요동동부도위의 벼슬을 내렸다. 이에 조선은 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습공격해 하를 죽이니, 천자는 죄인을 모집하여 조선을 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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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9 사기(BC 91) 06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를 따라 발해에 배를 띄우고,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좌장군 순체는 요동에서 출발하여 우거를 토벌하게 하였다. 우거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준비하였다. 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兵五萬人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右渠發兵距險
http://qindex.info/i.php?f=2642#41367
 
 BC 0109 漢의 조선 침공
제나라의 중심지는 발해만 안쪽에 있었다. 제나라 병력을 모아 출발시켰다면 당연히 이곳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발해 해안선은 내륙으로 더 깊이 들어가 있었다. 이곳에서 배를 띄우면 발해에 배를 띄우는 것이 된다. 당시의 항해는 가능한 한 해안선을 따라갔다. 조선을 향해 요동 반도로 건너가든 한반도로 바로 건너가든, 발해만 안쪽에서 띄운 배는 일단 제나라의 해안을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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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9 - 0108 사기(BC 91) 07
좌장군의 졸정인 다가 요동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진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다도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법에 따라 참형을 당하였다. 누선은 제(齊) 병사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험에 이르렀는데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으면서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엿보아 알고, 곧 성을 나와 누선을 치니 누선군은 패해 흩어져 도망갔다. 장군 양복은 그의 군사를 잃고 10여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아들였다.
http://qindex.info/i.php?f=2642#41368
 
 BC 0109 - 0108 사기(BC 91) 08
천자는 양 장군의 전세가 유리하지 않다고 여기고, 위산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를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사자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였으나 양 장군이 신을 속여서 죽일까 두려워했는데, 이제 신절을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태자를 보내 들어가 사죄하게 하고, 말 5천필을 바침과 아울러 군량미를 내주었다.
http://qindex.info/i.php?f=2642#41369
 
 BC 0109 - 0108 사기(BC 91) 09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지니고 막 패수를 건너려 할 때 사자와 좌장군은 그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에게 말하기를,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버리라고 명하시오.” 라고 하였다. 태자도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속이고 죽일까 의심하여 끝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버렸다. 산이 돌아와 천자께 보고하니 천자는 산을 죽였다.
http://qindex.info/i.php?f=2642#41370
 
 BC 0109 - 0108 사기(BC 91) 10
좌장군이 패수 위의 군사를 격파하고 전진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도 또한 가서 합세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끝내 성을 굳게 지키므로 몇 달이 되어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
http://qindex.info/i.php?f=2642#41371
 
 BC 0109 - 0108 사기(BC 91) 10
패수와 왕험성 사이에 또 다른 강이 있을 거 같지 않은 정황이다. 왕험성이 평양의 대동강 북안에 있었다면 패수는 청천강이 된다. 그리고 양복은 대동강 하구에 도착하여 왕험성을 공격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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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9 - 0108 사기(BC 91) 11
좌장군은 본시 시중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고 있는 데다가 燕과 代지방의 군사를 거느렸으므로 굳세었는데, 싸움에 이긴 기세를 타고 군사들이 더욱 교만해졌다. 누선은 齊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로 출병하였으나, 이미 여러번 싸움에 패하고 군사를 잃었으며, 앞서 우거와의 싸움에서 곤욕을 치른 패잔한 군사들이라 군사들은 모두 두려워 하고 장군은 부끄럽게 여겨 우거를 포위하고도 항상 화평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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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9 - 0108 사기(BC 91) 12
좌장군이 맹렬히 성을 공격하니, 조선 대신들은 몰래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누선에게 항복을 약속했으나, 말만 오고 갈 뿐 아직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좌장군은 여러 차례 누선과 싸울 시기를 정하였으나 누선은 약속을 급히 이루려고 싸움에 나가지 않았다. 좌장군 또한 사람을 보내 조선이 항복해 올 때를 탐문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반기지 않고 누선 쪽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로 인해 양 장군은 서로 반목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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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9 - 0108 사기(BC 91) 13
좌장군은 마음속으로 ‘누선은 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는 데다가 지금은 조선과 사사로이 잘 지내고 있으며, 조선 또한 항복하지 않으니 반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 하였으나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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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9 - 0108 사기(BC 91) 14
천자는, “장수들이 이룰 수 없으므로 전에 위산으로 하여금 우거를 달래 항복하도록 하여 우거가 태자까지 보냈는데도 산이 이를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좌장군과 서로 계교가 틀려 마침내 약속이 깨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양 장군이 성을 포위하고도 역시 어긋나고 달라서 오래도록 결판이 나지 못하고 있다.” 고 말하고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어 이를 바로잡고 상황에 맞게 처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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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9 - 0108 사기(BC 91) 15
수가 도착하니 좌장군이 말했다. “조선이 항복할 형편에 이른 지 오래되었는데도 항복하지 않는 것은 사정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누선이 여러 차례 싸우러 나오지 않은 것과 평소의 뜻하는 바를 수에게 낱낱이 고하였다. “지금 이와 같으니 체포하지 않으면 크게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누선 혼자만이 아니고 조선과 함께 우리 군사를 멸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수도 이를 옳게 여기고 누선장군을 체포하고 군사를 합친 뒤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수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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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9 - 0108 사기(BC 91) 16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여 맹렬히 조선을 치니, 조선의 상 노인과 상 한음과 니계상 삼 ·장군 왕협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 누선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누선은 지금 잡혀 있고 좌장군 단독으로 장졸을 합하여 전투가 더욱 맹렬하여 맞아서 싸우기 두려운데도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 하고 음·협·노인이 모두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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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8 사기(BC 91) 17
원봉 3년 여름, 니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하여 왔으나, 왕험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의 대신 성이가 또 반하여 군리들을 공격하였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과 상 노인의 아들 최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성이를 죽이도록 하였다.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4군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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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8 사기(BC 91) 18
삼을 봉하여 홰청후로, 음은 적저후, 협은 평주후, 장은 기후로 삼았으며, 최는 아버지가 죽은데다 자못 공이 있었으므로 온양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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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8 사기(BC 91) 19
좌장군을 불러 들여 오자 공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긋나게 한 죄로 처형하였다. 누선장군도 병사를 거느리고 열구(洌口)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도 제멋대로 먼저 군사를 풀어 많은 병사들을 잃어버렸으므로 주살함이 마땅하나 속전을 받고 서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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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8 사기(BC 91) 19
왕험성이 평양에 있었다면 양복이 왕험성을 치기 위해 도착한 열구는 대동강 하구가 되고 열수는 대동강이 된다. 이 침공 경로는 훗날 수나라가 고려의 평양성을 치기 위해 들어온 경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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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8 한서(82)
여름, 니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험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의 대신 성이가 또 반하여 다시 군리를 공격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長과 항복한 상 로인의 아들 最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성이를 주살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眞番·臨屯·樂浪·玄菟의 4군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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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8 한서(82)
낙랑군은 무제 원봉 3년에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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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0108 후한서(445)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낙랑, 임둔, 현토, 진번의 4군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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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45 후한서
濊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조선의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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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예·맥·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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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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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번
 東北亞 古代史 槪念圖    BC 0311 - 0279 사기(BC 91) 01    BC 0222 이전 사기(史記) 화식열전    BC 0221 - 0202 사기(BC 91)    BC 0195 - 0188 사기(BC 91) 02    BC 0195 - 0188 사기(BC 91) 03    BC 0195 - 0188 사기(BC 91)    BC 0109 ᑅ 사기(BC 91) 04    BC 0108 한서(82)    0082 한서    0289 삼국지    0289 삼국지    ¦진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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