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新羅民族論 > 0391 任那

391년에 倭는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함께 신라를 치고 比自㶱, 南加羅, 㖨國, 安羅, 多羅, 卓淳 그리고 加羅를 복속시킨 뒤 서쪽으로 돌아 忱彌多禮를 쳐 백제에게 주고 比利, 辟中, 布彌支 그리고 半古의 항복을 받아냈다. 倭가 복속시킨 지역은 북으로 차령과 팔공산까지 이르렀다. 이후 백제와 신라에 의해 조금씩 잠식되다 562년에 加羅가 신라에 병합되면서 모두 사라졌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任那의 유산이다.
 
영산 복강 동조현상
한국의 영산강 유역과 일본의 복강현이 동일한 고고학적 양상을 띠는 현상을 말한다. 남방계 고인돌, 독널무덤, 전방후원분 등에서 이 현상은 뚜렷하다. 따라서 영산과 복강은 동일한 종족적 유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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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吉野ヶ里遺跡(よしのがりいせき)
吉野ヶ里遺跡(よしのがりいせき)
미생시대 초기에서 중기에 걸쳐 복강 지역에는 죽은 사람을 큰 독널에 넣어 묻는 풍습을 가진 민족이 있었다. 큰 독널 무덤을 만드는 풍습은 한국의 영산강 유역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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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吉野ヶ里遺跡(よしのがりいせき)
吉野ヶ里遺跡(よしのがりいせき)
미생 시대의 마을은 도랑과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를 環濠集落이라 한다. 한국에서는 영남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시기적으로는 청동기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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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720) 新羅國
소잔오존의 하는 짓이 매우 버릇이 없었으므로 여러 신들이 그 벌로 많은 재물을 바치게 하고 마침내 쫓아 내었다. 이 때 소잔오존은 그의 아들 오십맹신을 데리고 신라국(新羅國)에 내려가 증시무리란 곳에 살았다. 말하기를 “이 땅에서 나는 살고 싶지 않다”하고는 찰흙으로 배를 만들어 그것을 타고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출운국 파천 가에 있는 조상봉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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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720) 韓地
처음에 오십맹신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나무의 종자를 많이 가지고 왔다. 그러나 한지(韓地)에는 심지 않고 모두 가지고 돌아와 마침내 축자로부터 대팔주국 안에 심어 푸른 산이 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오십맹신을 일컬어 공이 있는 신이라 하는데, 기이국에 모셔진 대신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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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720) 韓鄕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소잔오존이 “한향(韓鄕)의 섬에는 금은이 있다. 만약 내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배가 없으면 (한국으로 건너갈 수 없으니) 좋지 않다”하고는 수염을 뽑아 뿌리니 삼나무가 되었다. 또 가슴의 털을 뽑아서 뿌리니 이것이 전나무가 되었고 꽁무니의 털은 비자나무가 되었으며 눈썹의 털은 녹나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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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720) 韓鋤劍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소잔오존이 기도전원과 결혼하고자 하여 청하니 각마유와 수마유가 “바라건대 먼저 저 뱀을 죽이십시오. 그런 다음 결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 뱀은 머리에 각각 소나무가 나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산이 있어 매우 무섭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그를 죽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소잔오존이 꾀를 내어 독한 술을 빚어서 그에게 먹였다. 뱀이 취하여 잠이 들자 소잔오존이 뱀을 한서검(韓鋤劍)으로 머리와 배를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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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에서 출운으로
¦신라에서 출운으로
소잔오존은 신라국(新羅國)에서 바다를 건너 출운으로 갔고 그의 이야기에는 한지(韓地), 한향(韓鄕) , 한서검(韓鋤劍) 등 한국과 관련된 말이 많이 나온다. 또 그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상이 항상 어둡게 되었다(六合之內常闇)'는 부분은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日月無光)'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연오랑과 세오녀도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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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3~-0027 蘇那曷叱知 · 阿羅斯等 · 天之日矛 · 天日槍
일본서기(720)는 阿羅斯等에 대해 외교 사절로 일본에 왔다는 이야기와 도망간 여자를 찾아 일본에 왔다는 두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전자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蘇那曷叱知의 이야기와 같고 후자는 고사기(712)에 나오는 天之日矛의 이야기와 같다. 한편, 일본서기는 天日槍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는데 天日槍은 고사기의 天之日矛와 동일인이다. 阿羅斯等은 529년에 나오는 阿利斯等이나 583년에 나오는 阿利斯登과 혼동하여 만들어진 인물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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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3 일본서기(720) 蘇那曷叱智
任那國遣蘇那曷叱知令朝貢也 任那者去筑紫國二千餘里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 리 북쪽에 있는데 (축자국과는) 바다로 막혀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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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3 일본서기(720) 蘇那曷叱智
❶ 北阻海의 주어를 임나로 보고 '임나의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다'라고 해석해야 하나, 그렇게 하면 일본서기의 다른 기록들과 맞지 않는다. 일본서기에서 임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여기서의 임나는 축자 및 계림과의 상대적 위치로 보아 남가라를 뜻한다. 이것이 임나의 첫번째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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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8 일본서기(720) 蘇那曷叱智
임나인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가 “나라에 돌아가고 싶다.”고 청하였다. 아마도 선황의 시대에 알현하러 와서 아직 돌아가지 않았던 것인가? 그래서 소나갈질지에게 융숭하게 상을 주었다. 아울러 붉은 비단 1백 필을 주어 임나왕(任那王)에게 하사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아 이것을 빼앗아버렸다. 양국의 원한이 이때 처음으로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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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8 일본서기(720) 阿羅斯等
그 국호를 미마나국(彌摩那國)이라 함은 이것이 연유가 된 것이다. 아라사등은 받은 붉은 비단을 자기 나라의 군부(郡府)에 보관하여 두었다. 신라인이 그것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와서 붉은 비단을 모두 빼앗았다. 이것이 두 나라가 서로 원망하게 된 시초라고 한다. ▐ 任那는 みまな라 발음한다. 따라서 彌摩那는 任那와 같은 말이다. 意富加羅國은 남가라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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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8 일본서기(720) 阿羅斯等
그들이 제사지내는 신은 흰 돌이어서 흰 돌을 소 값으로 받았다. 그것을 가지고 와서 침실 속에 두자 그 신석(神石)이 아름다운 소녀로 변했다. 아라사등은 몹시 좋아하여 교합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아라사등이 다른 곳에 간 사이에 소녀가 갑자기 사라졌다. 아라사등은 크게 놀라 자기 처에게 “소녀는 어디로 갔는가?”라고 물었다. “동쪽으로 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곧 찾아서 멀리 바다를 건너 일본국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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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7※ 고사기(712) 天之日矛
옛날에 천지일모라는 신라 왕자가 건너왔다. 그 신라에 아구라는 늪(ぬま)이 있었다. 그 늪 가에서 한 여자가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햇빛이 무지개처럼 빛나며 그 여자의 몸을 비추었다. 한 남자가 이것을 이상히 여겨 그 여자를 계속 엿보았다. 그 여자는 그때 임신을 했는데, 나중에 붉은 옥을 낳았다. 엿보던 그 남자가 애원하여 그 옥을 얻고는 항상 허리에 차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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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7 일본서기(720) 天日槍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이 건너왔다. 가지고 온 물건은 우태옥 한 개, 족고옥 한 개, 제록록의 적석옥 한 개, 출석의 소도 한 구, 출석의 창 한 자루, 일경 한 면, 웅신리 한 구 등 모두 일곱 개의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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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7 신라에서 단마로
-0027 신라에서 단마로
천일창의 이동 경로는 신라-파마-근강-약협-단마이고 아라사등의 이동 경로는 가라-혈문-출운-사반포다. 천지일모의 최종 정착지는 다지마로 천일창의 최종 정착지인 단마와 동일한 곳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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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 三國史記(1145)
호공(瓠公)을 마한에 보내 예를 갖추니 마한 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했다.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姓)을 알 수 없다.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허리에 표주박을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호공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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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삼국유사(1281) 龜旨
북쪽 구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를 일컫는 것으로 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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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일본서기(720) 高千穗峯
고황산이 신성한 이불로 황손 천진언을 덮어서 내려 보냈다. 황손은 천반좌를 떠나 또 하늘의 팔중 구름을 헤치고 그 위세로 길을 헤치고 나가 일향의 습(襲)의 고천수봉에 강림하였다. 황손이 “나라가 있는가 없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여기에 나라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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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남가라에서 일향으로
0042¦남가라에서 일향으로
고대 문화는 대체로 반도에서 열도로 흘러갔다. 따라서 구지봉 설화가 건너가 고천수봉 설화가 되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이것은 일본 천황가가 남가라 유민에서 나왔다는 주장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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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史記(1145) 脫解
탈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때 나이는 62세였다. 성은 석씨이고 왕비는 아효부인이었다. 탈해는 본래 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다. 처음에 금관국의 해변에 이르렀는데 금관 사람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남해왕 5년에 그가 어질다고 듣고 딸을 그의 처로 삼았다. 7년에는 등용해 대보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 多婆那는 丹波일 가능성이 있다.
5999#14930
 
0057 後漢書(445)
建武中元二年倭奴國奉貢朝賀使人自稱大夫倭國之極南界也光武賜以印綬 왜의 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조알하였다. 사신은 대부를 칭했는데, 왜국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나라다. 광무제는 인수를 하사하였다. ▐ 기록에 나타나는 倭의 최초 조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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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9 일본서기(720)
군경에게 “짐이 듣건대 신라의 왕자 천일창이 처음 왔을 때 가지고 온 보물이 지금 但馬에 있다고 들었다. 그때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 신보로 되었다. 짐은 그 보물을 보고 싶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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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2 漢書
樂浪海中有倭人分為百餘國以歲時來獻見雲 낙랑의 바다 가운데에는 왜인이 사는데, 100여 개의 나라로 갈라져 있고 해마다 와서 공물을 바친다. ▐ 한서에서는 조선, 예맥, 구려 그리고 倭까지 거론되었지만 韓은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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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 後漢書(445)
安帝永初元年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願請見 왜의 국왕 수승 등이 생구 160명을 바치고 황제에게 알현하기를 원하였다. ▐ 조공의 거리나 규모를 보았을 때 왜국의 권력 집중이 상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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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6~0232 倭國大亂
왜왕 帥升 이후 혼란이 있었다가 卑彌呼가 왕이 되면서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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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6~0232 高地性集落
0146~0232 高地性集落
미생 시대 중기부터 들과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 마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환호집락이 부락 단위의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다면 고지성집락은 바다를 건너오는 적들과의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다. 그래서 고지성집락은 倭國大亂과 연결한 설명이 많이 나오고 있다. 倭國大亂때 일본 서부에서 바다를 통해 동쪽으로 정복활동이 벌어졌고 고지성 집락은 그에 대응한 흔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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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8 삼국유사(1281) 日月無光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 일관이 나아가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있었는데 지금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였다. 是時新羅日月無光 日者奏云 日月之精降在我國 今去日本故致斯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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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8※ 일본서기(720) 六合之內常闇
천조대신이 신성한 건물에서 베틀로 신의(神衣)를 짜고 있을 때는 얼룩말 가죽을 벗겨 지붕 위의 기와를 뜯고 던져 넣었다. 이 때문에 천조대신은 깜짝 놀라 베틀에 몸이 닿아 상처를 입었다. 이 일로 크게 노하여 천석굴에 들어가 돌문을 닫고 숨어 버렸다. 이로 인해 세상은 항상 어둡게 되었고 밤낮이 바뀌는 것도 알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天照大神 乃入于天石窟 閉磐戸而幽居焉 故六合之內常闇而不知晝夜之相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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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0~0265 曹魏
魏의 曹丕는 漢의 마지막 황제로부터 자리를 넘겨받았는데, 이후 蜀 및 吳와 다툼을 벌였다. 이 시기를 삼국시대라고 한다. 蜀과 吳는 각각 264년과 280년에 魏와 晉에게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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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0~0265 위략(魏略)
魏略云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 - 唐 顔師古 왜는 대방군 동남 쪽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이 많은 섬에 의거하여 나라를 이루고 산다. 바다 건너 천리에 또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의 종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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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3(<0173) 三國史記(1145) 신라
왜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 173년은 중국의 사서에 비미호가 나타나는 시기와 60여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1주갑 조정한다.
14205
 
0238 이후 晉書(648)
선제(사마의)가 공손씨를 평정하자 倭의 여왕이 사신을 대방에 파견하여 조알하였다. 그 뒤에도 조빙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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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9-06(<238) 三國志(289)
왜 여왕이 대부 난승미 등을 보내 군에 이르러 천자에 조헌할 것을 청하니 태수 유하가 관원과 장수를 보내 경도까지 호송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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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9-12(<238) 三國志(289)
조서를 내려 倭 여왕에게 말했다. "친위왜왕 비미호에게 제조한다. 대방태수 유하가 관리를 보내 너희 대부 난승미와 차사 도시우리를 호송하게 했고 너희들이 바친 남자노비 4명, 여자노비 6명, 반포 2필 2장이 도착했다. 너는 아주 멀리 있으면서도 사자를 보내 조공하니 이것이 너의 충효로구나. 갸륵하도다. 이제 너를 친위왜왕으로 임명하고 금인, 자수를 내리고 장봉하여 대방태수에게 보내 네게 하사토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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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0 三國志(289)
태수 궁준이 건충교위 제준 등을 보내 조서와 인수를 받들어 왜국에 이르게 했다. 왜왕으로 임명하고 아울러 가져온 금(金), 비단, 융단, 칼(刀), 거울(鏡), 채물을 하사했다. 이에 왜왕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은조에 사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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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0 晉書(648)
正始元年春正月東倭重譯納貢 동쪽의 왜가 멀리서 와서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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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0~247 晉書(648)
及文帝作相又數至 문제(사마소)가 국상이었을 때에도 (倭가 조빙을) 여러 번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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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3 三國志(289)
왜왕은 다시 사신으로 대부 이성기, 액사구 등 8명을 보내 노비, 왜금, 강청겸, 면의, 면포, 단목, 견부, 단궁시를 헌상했다. 액사구 등을 모두 솔선중랑장으로 임명하고 인수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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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조서를 내려 왜의 난승미에게 황당을 하사했는데 군(郡)으로 보내 수여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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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韓
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삼고 남쪽은 倭와 접해 있다. 마한, 진한 그리고 弁韓 세 종족이 있다. 진한과 변한은 모두 24국인데 이 중 열 두 나라는 진왕에게 소속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사람을 앉혀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으며 스스로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변한의 독로국은 倭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변한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韓, 濊 그리고 倭의 사람들이 모두 와서 사 가며 낙랑과 대방에도 공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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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倭 1
왜인은 대방군 동남 쪽 큰 바다 가운데에 사는데,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나라와 마을을 이루었다. 이전에는 100여개 나라였는데, 한(漢) 조정에 알현하는 나라가 있었고, 지금은 사신이 왕래하는 곳이 30개 나라다. ▐ 대마국에서 야마일국까지 8국이 있고 사마국에서 노국까지 21국이 있는데 여기에 야마일국에 소속되지 않은 구노국까지 합하면 모두 30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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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倭 2
대방에서 倭에 가려면 해안을 따라 한국을 지나 남쪽으로 간 다음 다시 동쪽으로 가면 북쪽 해안에 있는 狗邪韓國에 이르는데 거기에서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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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倭 3
남쪽으로 가면 야마일국에 이르는데, 여왕이 도읍한 곳으로 바닷길로 10일 동안 가고 육상으로 1개월 동안 간다. 관리로는 이지마가 있고, 그 다음은 미마승이라 부르며, 그 다음은 미마획지라 부르고, 그 다음은 노가제라 부른다. 7만여 호 정도가 있다. ▐ 邪馬壹國은 邪馬臺國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대마국에서 야마일국까지 8국이 15만호였다. 마한이 10여만 호고 변진이 4~5만 호였으니 이 8국의 호수가 韓 전체의 호수와 비슷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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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7 三國志(289)
태수 왕기가 관부에 도착하였다. 왜 여왕 비미호와 구노국 남왕 비미궁호는 평소 불화했는데 재사, 오월 등을 군으로 보내 서로 공격하는 상황을 설명한 적이 있다. 새조연사 장정 등을 파견해 가져간 조서와 황당을 난승미에게 하사하고 격문으로 이를 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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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8- 三國志(289)
비미호가 마침내 죽자 새롭게 남자 왕을 세웠으나 국중의 사람들이 승복하지 않아서 비미호 종실의 여자인 일여를 세웠다. 일여는 왜의 대부인 솔선중랑장 액사구 등 20인으로 하여금 장정 등을 송환시켰고 이때 남녀 생구 30인을 헌상하고 백주 5천개, 공청대구주 2매 그리고 이문잡금 20필을 공물로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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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6 晉書(648)
倭가 사자를 파견하여 중역하며 들어와 조공을 하였다.
5999#7855
 
0267 ~ 0412
이 기간에는 중국 사서에 왜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비미호 왕조가 왜5왕으로 그대로 이어졌는지 왕조 교체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신무 천황의 동정 이야기가 이 기간에 있었던 일일 수 있다. '구주의 일향에 가라와 동일한 계통의 건국 설화를 가진 집단이 있었고 그들이 동쪽으로 정벌에 나서 내량에 있던 견고한 왕조(비미호 왕조?)를 무너뜨리고 그곳을 차지한다'는 이야기인데, 한국 진출도 이 이야기의 끝에 덧붙여 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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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0~0390  三韓의 재편
0290~0390 三韓의 재편
중국에서 서진이 중원에서 밀려나면서 한반도도 재편되었다. 낙랑과 대방이 고려에 흡수되고 백제와 신라가 성장하여 각각 마한과 진한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변한과 차령 이남은 미처 고대왕국으로 발전하기 전에 倭의 지배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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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5 三國史記(1145)
봄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백제와 함께 도모해서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들어가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서불한 홍권이 대답하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 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왕이 “옳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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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0-10-03 일본서기(720)
和珥津에서 출발했다. 이 때 바람의 신은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의 신은 파도를 일으켰으며 바다 속의 큰 고기가 모두 떠올라 배를 도왔다. 신라왕이 이를 보고 흰 끈을 목에 걸어 항복하였다. 고려와 백제 두 나라 국왕도 스스로 군영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조공을 서약하였다. ▐ 이때는 신라만을 복속시킨 것으로 보이며 임나에 대한 지배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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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6 ↶ 백제와 왜의 만남
백제왕이 久氐·彌州流·莫古 세 사람을 보내어 일본에 조공하게 했는데 이들이 卓淳國에 와 길을 물었으나 길을 알 지 못하며 또 큰 배가 있어야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만약 일본에서 사신이 오면 자기 나라에 알려 달라는 부탁을 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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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6 백제와 왜의 만남
왜가 斯摩宿禰를 탁순국에 보냈는데 卓淳王 末錦旱岐로부터 백제 이야기를 듣고 종자 爾波移와 탁순인 過古 두 사람을 백제국에 보냈다. 백제 肖古王이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고 다섯 가지 빛깔의 채견 각 1필과 각궁전 및 철정 40매를 爾波移에게 주었다. 이에 爾波移가 돌아와서 志摩宿禰에게 보고하자 바로 탁순으로부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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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 七枝刀
久氐 등이 千熊長彦을 따라와서 七枝刀 1자루와 七子鏡 1개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백제왕이 말하기를 “손자 枕流王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 동쪽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이다. 그래서 천은을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다져 토물을 거두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라 일러두었습니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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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廣開土王陵碑(414)
백잔과 신라는 옛부터 고려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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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일본서기(720)
왜의 황전별과 녹아별이 탁순에 이르러 사백과 개로를 백제에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다. 백제의 목라근자와 사사노궤가 오자 함께 신라를 치고 7국을 평정하였다. 서쪽으로 가 고해진에 이르러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초고와 귀수가 왔는데 이때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초고는 의류촌에서 왜군을 전송하고 천웅장언과 함께 백제의 벽지산과 고사산에 차례로 올라 맹세하고 도읍으로 돌아와 대접한 뒤 구저를 딸려 천웅장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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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연도 조정
▐ 이 사건은 엄청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기록에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일본서기가 없던 사건을 만들어 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니, 이 사건도 있기는 있었을 것이다. 이 기록과 가장 근접한 것은 광개토왕릉비의 391년조 기록이다. 그래서 신공황후 49년의 기록을 391년에 일어난 것으로 설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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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왜와 백제의 영토 분할
▐ 왜와 백제는 동쪽의 7국을 왜가 갖고 서쪽의 침미다례 및 4읍은 백제가 갖기로 합의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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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왜의 한국 개입
0391 왜의 한국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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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七國┆㖨┆加羅┆卓淳┆南加羅┆多羅┆安羅┆比自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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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古奚津┆忱彌多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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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四邑┆比利┆辟中┆布彌支┆半古
8475 COMMENT
 
0396 광개토왕릉비(414)
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跪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 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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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 광개토왕릉비(414)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을 토벌하였다. 백잔이 항복하지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그 성을 압박하였다. 그리고 곧 그 성을 에워쌌다. 이에 백잔주가 곤란해져 남녀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무릎을 꿇고 영원히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얻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8502 COMMENT
 
0397 일본서기(720)
百濟人來朝 百濟記云 阿花王立無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及峴南支侵谷那東韓之地 是以遣王子直支于天朝以脩先王之好也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백제기에는,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지침·곡나·동한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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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7 峴南┆支侵┆谷那┆東韓
8476 COMMENT
 
0397¦왜의 영토 회수
전년에 있었던 패전이 매우 실망스러웠기 때문에 침미다례 및 현남·지침·곡나·동한의 땅을 빼앗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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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0 광개토왕릉비(414)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安羅人) 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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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0 광개토왕릉비(414)
▐ 임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安羅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여기서의 任那加羅는 남가라로 추정된다. 임나는 광개토왕릉비(414) 뿐만 아니라 송서(488), 남제서(537), 양서(636), 남사(659), 일본서기(720), 봉림사진경대사비(924), 삼국사기(1145) 등 광범위한 기록에 등장한다. 이에 비해 加耶는 삼국사기 이전의 기록에서 사용된 예를 아직 보지 못했다. 여기서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의 모형을 따르기로 한다.
6682
 
0400± 황남대총과 대선릉고분
0400± 황남대총과 대선릉고분
위의 왼쪽 가운데 쌍분이 황남대총이고 오른쪽 전방후원분이 대선릉고분이다. 황남대총은 350~450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대선릉고분은 인덕 천황(433~519)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각각 길이가 120m와 525m로 한국과 일본에서 가장 크다.
6136 COMMENT
 
0403 일본서기(720)
궁월군이 백제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은 우리나라 120현의 인부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갈성습진언을 파견하여 궁월의 인부를 가라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습진언(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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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 이덕일의 영산 왜
0404 이덕일의 영산 왜
가운데 그림은 영산강 유역에 왜가 있었다는 이덕일의 가설이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왜가 391년에 바다를 건너왔고 399년에는 신라를 점령한 상태였으며 400년에는 그 신라 점령군이 고려에 쫓겨 임나가라로 퇴각하였고 404년에는 대방을 침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한반도에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설정해야 자연스러우며 그 주둔지로는 영산강 유역 외에 마땅한 장소가 없다. 이덕일의 가설은 그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11595
 
0405-02~08 일본서기(720)
백제의 아화왕이 죽었다. 천황은 직지왕을 불러,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동한의 땅을 주어 보냈다. 동한은 감라성·고난성·이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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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08(<-285) 일본서기(720)
평군목토숙니·적호전숙니를 가라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조를 내려, “습진언(襲津彦)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틀림없이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고 하였다. 이에 목토숙니 등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신라의 국경에 다다르자, 신라왕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자복하였다. 그래서 궁월의 인부를 거느리고 습진언과 함께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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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습진언의 고립
이 사건은 일본 열도에서 바다 건너 한국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왜인이 상주하며 한반도 남부의 여러 나라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기구를 한국에 설치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국사(任那國司)나 일본부(日本府)는 그러한 필요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6673 COMMENT
 
0413 ~ 0502 倭5王
왜왕의 왕위계승은 讚(贊)-珍(彌)→濟→興-武로 이어졌는데 讚-珍과 興-武는 형제관계이고 珍→濟→興은 부자관계다.
5999#3439 COMMENT
 
0413 梁書(636) 晉書(648)
왜왕 贊이 동진에 공물을 바쳤다.
6904
 
0420 東晉→劉宋 왕조교체
0420 東晉→劉宋 왕조교체
7859
 
0421 宋書(488)
고조가 조서를 내렸다. "왜의 讚이 만리 먼 곳에서 공물을 바쳤다. 먼 곳에서 보인 성의를 널리 알리기 위해 벼슬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
6703
 
0425 宋書(488) 讚이 사마 조달을 보내어 표를 올리고 특산물을 바쳤다.
7286
 
0430 宋書(488) 왜국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7817
 
0438 宋書(488)
讚이 죽자 아우 珍이 왕이 되어 유송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불렀다. 표를 올려 바른 벼슬을 요청해와 조서를 내려 안동장군 왜국왕에 봉했다. 珍이 또 왜수 등 13명에게 평서, 정로, 관군, 보국장군의 이름을 붙여 달라 하므로 모두 들어 주었다.
7818
 
0443 宋書(488) 왜국왕 濟가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므로 다시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삼았다.
7846
 
0445 후한서
倭在韓東南大海中依山島為居凡百餘國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國皆稱王世世傳統其大倭王居邪馬臺國 倭는 韓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100여개의 나라로 되어 있다.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킨 후, 漢과 사신의 왕래가 통하는 곳이 30여개 된다. 나라의 수장은 모두 왕을 칭하는데 대대로 왕통이 이어졌다. 그 대왜왕(大倭王)은 야마대국(邪馬臺國 やまたいこく)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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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1 宋書(488)
(유송이 왜왕에게)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를 더하고 안동장군은 전과 같이 하고 아울러 올린 23인의 軍과 君을 제수하였다.
7852
 
0455 百濟新撰
개로왕이 즉위하였다. 천황이 아례노궤를 보내와 여자를 물색하게 하였으므로 백제에서 모니부인의 딸 적계여랑을 잘 꾸며서 천황에게 바쳤다.
8471
 
0458 日本書紀(720)
백제의 지진원(적계여랑)은 천황이 장차 동침하려는 것을 거스리고 석천순과 몰래 정을 통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대반실옥대련에게 명하여 내목부를 시켜 부부의 사지를 나무에 펼쳐 임시로 만든 시렁 위에 올려 놓고 불에 태워 죽였다. 
22504
 
0460 宋書(488) 왜국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7848
 
0461-04 日本書紀(720)
백제 가수리군(개로왕)은 지진원이 불에 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옛날에 여자를 바쳐 채녀로 삼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이름을 실추시켰으니 지금부터는 여자를 바치지 않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였다. 그의 아우 군군(곤지)에게 “네가 일본에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였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면서 “나의 부인은 이미 산달이 되었다. 만일 가는 길에 출산하면 배 한 척에 실어 속히 본국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22505
 
0461-06 日本書紀(720)
임신한 부인이 과연 가수리군의 말처럼 축자의 각라도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을 嶋君이라 하였다. 이에 군군은 곧 한 척의 배로 도군을 본국에 보내었는데 이가 무령왕이 되었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主嶋라 일컬었다.
22506
 
0462 宋書(488)
濟가 죽자 세자인 興이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였다. 조하여 "왜왕의 세자 興은 여러 해 동안 충성을 하고 바깥 바다의 번국이 되어 교화를 받아들여 변경을 편안히 하였고 공손히 공직을 닦았다. 새로이 변경의 왕업을 이었으니 마땅히 작호를 내리되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한다."고 하였다.
7853
 
0463 전협과 제군의 반란
전협은 궁중에서 시종을 하고 있었는데 큰 소리로 아내 치원의 미모를 자랑하였다. 천황이 듣고 전협을 임나국사로 보낸 뒤 치원과 동침하였다. 그 소식을 듣은 전협은 신라로 망명할 생각을 하였다. 신라는 이때 倭를 섬기지 않고 있었는데 천황은 전협의 아들 제군에게 신라를 정벌하라 명했다. 제군은 무리를 이끌고 백제에 도착하여 신라에 들어가다 되돌아가 섬에 머물렀다. 이를 못마땅해 한 제군의 아내 장원이 제군을 죽이고 천황이 보낸 사람을 따라 복명하였다.
5999#22507
 
0464 신라 구원
웅략 천황이 즉위한 이후 8년째 신라는 倭를 섬기지 않고 고려와 우호를 맺어 고려의 날랜 병사 100명이 신라를 지켜 주었다. 그러나 고려가 신라를 삼키려 한다는 오해를 한 신라왕이 고려군을 죽이게 하였고 고려는 군사를 일으켜 신라로 쳐들어갔다. 사방에서 고려군의 노랫소리가 들리자 신라는 임나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日本府 行軍元帥로 하여금 구원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임나왕이 선신반구, 길비신소리, 난파길사적목자에게 권하여 신라를 구해주도록 했다.
5999#22508
 
0465 신라 침공
기소궁숙니·소아한자숙니·대반담련·소록화숙니 등에게 칙명으로 “신라는 본래 서쪽 땅에 있으면서 고려의 조공을 막고 백제의 성을 병탄하였다. 하물며 다시 조빙을 이미 걸렀으며 공물도 바치지 않았음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대들 네 경을 대장으로 삼으니 왕사를 거느리고 가 쳐서 하늘이 내리는 벌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였다. ... 얼마 후 남은 무리들이 스스로 물러가니 관군도 따라서 물러났다. 대장군 기소궁숙니는 병에 걸려 죽었다.
21828
 
0475-0561 百濟의 남하
0475-0561 百濟의 남하
백제가 고려에 의해 한성에서 밀려나 차령 이남으로 내려오자 기존의 임나 소국들을 잠식해 들어가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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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 일본서기(720)
천황이 백제가 고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구마나리를 문주왕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백제국은 비록 거의 망해 창하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다. 일본구기에서는 “구마나리를 말다왕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의 하치호리현의 별읍이다. (久麻那利者任那國下哆呼唎縣之別邑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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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 久麻那利
▐ 구마나리는 그 북쪽에 있는 차령과 함께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 구마나리가 하치리의 별읍이었다고 하니 하치리는 구마나리 남쪽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치리는 그 이름으로 보아 하치리의 상류에 있었을 것이다. 한편, 중원고려비에는 고모루성이 나오는데, 이것으로 보아 고모루성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다. 그 고모루성 또한 모루성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고, 그 모루가 구마나리에서 멀지 않았다고 하니, 모루를 구마나리와 중원고려비 사이로 설정해 본다.
21830
 
단군설화의 기원
ᐥ단군설화는 중국의 위만이 평양으로 건너와 세웠다는 위만조선의 건국설화에서 비롯되었다.ᐥ
 
0477 任那²
0477 任那²
任那¹ = 南加羅 ┆ 任那² = 백제와 신라를 제외한 한국의 소국 통칭 ┆ 任那³ = 加羅 ❷ 任那는 원래 남가라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의미가 확장되어 백제와 신라를 제외한 한국의 나머지 소국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도 쓰였다. 이것이 任那의 두번째 의미다. 훗날 남가라가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는 任那가 가라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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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 宋書(488) 왜국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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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8 宋書(488)
興이 죽자 아우인 武가 즉위하여 사지절 도독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였다. 武를 사지절 도독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하였다.
7854
 
0479 劉宋→蕭齊 왕조교체
건원 원년에 왜 임금에게 새로 벼슬을 내려주어 사지절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으로 삼았다. 왜 임금 武는 호칭을 진동대장군이라 하였다.
7857
 
0487 일본서기(720)
이 해 기생반숙니가 임나를 점거하고 고려와 교통하였으며, 서쪽에서 장차 삼한의 왕노릇하려고 관부를 정비하고 스스로 신성이라고 칭하였다. 임나의 좌로·나기타갑배 등이 계책을 써서 백제의 적막이해를 이림에서 죽이고(爾林은 고려의 땅이다) 帶山城을 쌓아 동쪽 길을 막고 지켰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다. 백제의 왕이 크게 화가 나, 령군 고이해·내두 막고해 등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대산성에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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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南齊→蕭梁 왕조교체
양나라 무제가 즉위하여 武의 칭호를 정동대장군으로 올렸다.
8359
 
0512 四縣 분쟁
上哆唎┆下哆唎┆娑陀┆牟婁 ▐ 백제는 왜에 임나 4현의 할양을 요청하였고 왜는 이를 수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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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己汶 분쟁
백제는 513년에 가라가 점유하고 있던 기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왜는 백제의 손을 들어주었고 가라는 이에 반발하여 신라를 공격하고 일전을 준비하였다. 왜군이 가라를 침공하였으나 패하였고 백제의 장수는 신라로부터 나아가 가라를 공격하였다. 결국 기문은 백제가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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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己汶 분쟁 직후
0516 己汶 분쟁 직후
백제는 새로 획득한 4현과 상기문을 추가해서 영토를 22담로로 묶었다. 이때의 영토는 훗날의 신라 웅주와 전주를 합한 것과 같다. 영산 지역은 신라 무주에 해당되는데 이때까지는 백제의 영역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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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영산 마한
양직공도(梁職貢圖 526-539)에는 백제가 521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신을 소개했는데, 지방을 22담로로 나누어 통치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660년에 백제가 망할 때는 지방에 37군이 있었다. 한국통일 이후 신라는 옛 백제 지역을 웅주, 전주 그리고 무주로 나누고 각각 13개, 10개 그리고 14개의 군을 두었다. 모두 합하면 37개로 백제가 망할 때의 군과 숫자가 같다. 웅주와 전주만 놓고 보면 23개의 군으로 양직공도에 나오는 담로와 숫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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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양직공도(梁職貢圖)
所治城曰固麻謂邑曰檐魯如中國郡縣有二十二檐魯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叛波卓多羅前羅斯羅止迷麻連上己文下枕羅等附之 다스리는 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처럼 22담로가 있다. 자제와 종친들에게 나눠주었다. 주변에는 소국이 있는데 반파·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련·상기문·하탐라 등이 부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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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양직공도(梁職貢圖)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魏時曰新羅宋時曰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王不能自通使聘普通二年其王名募秦始使隨百濟奉表献方物 사라국은 본래 동이 진한의 한 소국이었다. 조위 때에는 신라라 했고 유송 때에는 사라라 했지만 사실은 하나다. 때로는 韓에 속했고 때로는 倭에 속했다. 국왕은 스스로 사신을 보내 조빙할 능력이 없었다. 521년에 募秦이라는 왕이 처음으로 백제의 편에 사신을 딸려보내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6667
 
0521 百濟 旁小國
上己文┆下枕羅┆前羅┆卓┆叛波┆多羅┆斯羅┆止迷┆麻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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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근강모야신의 실패
527년 왜(倭)는 근강모야신으로 하여금 6만의 군사를 이끌고 임나에 나아가 남가라와 녹기탄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게 하려 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 축자국조 반정이 방해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축자는 오늘날의 구주 북부에 있던 나라로 일본 열도의 관문과 같은 곳이었다.  529년 왜(倭)는 다시 모야신을 안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이 문제의 해결을 맡겼다. 모야신은 안라에 큰 당을 세워 백제와 신라의 사신을 불러 칙을 전했다. 임나왕 아리사등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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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근강모야신의 실패
여기서 임나에 대한 왜(倭)의 개입이 어떤 양상이었는지 대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임나에는 '한기'라고 불리는 여러 왕들이 있었고 그들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아 임나의 여러 나라는 기본적으로 여느 왕국과 다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왜(倭)가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임나의 여러 나라와 주변의 왕국 사이에서 질서를 주도하였는데 이 점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임나와 왜(倭)는 바다로 갈라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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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四村
金官·背伐·安多·委陀┆多多羅·須那羅·和多·費智┆多多羅·須奈羅·和陀·發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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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多沙津 분쟁
가라에는 倭로 건너가기에 좋은 다사진이라는 나루터가 있었다. 백제가 이 진을 탐내자 倭가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반발한 가라는 신라와 가까워졌고 마침내 가라왕은 신라의 왕녀와 혼인까지 하였다. 신라는 이것을 기회로 가라의 일부 영토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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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日本書紀(720)
任那³王 기능말다한기가 와서 조회하였다. (기능말다란 대개 아리사등이다.) 대반대련금촌에게 “지금 신라는 원래 내려주었던 경계를 어기고 자주 경계를 넘어 침략해 오니 청컨대 천황께 아뢰어 신의 나라를 구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❸ 여기에 任那王으로 나오는 阿利斯等은 다사진 분쟁 때 신라 왕녀와 결혼했던 가라왕 阿利斯等이다. 任那는 남가라가 신라에 병합된 후 가라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것이 任那의 세번째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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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백제의 팽창
0529※ 백제의 팽창
任那²에 설치한 기구를 통해 이루어지던 倭의 간섭은 이후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모야신의 실패로 任那²에 설치한 통치기구에 대해 회의가 들었으며 둘째, 백제 편향으로 인해 任那²의 倭에 대한 거부감이 커져갔으며 셋째, 백제가 다사진을 확보하여 사신교환의 용이한 통로가 확보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백제는 倭를 이용하여 任那²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
6718
 
0541 下韓(南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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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4 日本書紀(720)
안라의 차한기 이탄해, 대불손, 구취유리 등과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 졸마의 한기, 산반해의 한기의 아들, 다라의 하한기 이타, 사이기의 한기의 아들, 자타의 한기 등이 임나 일본부의 길비신과 더불어 백제에 가서 함께 조칙을 들었다. 백제의 성왕이 임나의 한기들에게,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더불어 힘을 다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천황에게 의지하면 임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기뻐하며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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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7 日本書紀(720)
백제는 안라의 일본부가 신라와 더불어 계책을 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 나솔 비리막고, 나솔 선문, 중부 나솔 목리미순, 기신 나솔 미마사 등을 보내 안라에 가서 신라에 온 임나의 집사를 불러 임나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안라 일본부의 하내직이 신라와 공모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 그리고 왕은 임나에게, “경(卿) 등이 번번이 감언을 믿고 경솔하게 거짓말에 속아서 임나국을 멸하고 천황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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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5-09 일본서기(720)
백제가 중부 호덕 보제 등을 임나에 사신으로 보내어 오(吳, 중국 남조를 가리킨다)나라의 재화를 일본부의 신하와 여러 한기에게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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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8 馬津城 전투
백제가 중부간솔 약엽례 등을 보내어 "마진성(馬津城)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가 ‘안라국과 일본부가 불러 들여 벌줄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사정으로 미루어 상황을 보더라도 진실로 서로 비슷합니다."라고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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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1~0554
0551~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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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1~0554
백제가 任那³와 함께 고려를 침공하여 한성을 되찾고 더 진군하여 평양까지 차지하였다. 신라도 고려를 침공하여 10군을 빼앗았다. 돌궐의 침공까지 받아 위기에 처한 고려는 신라와 손을 잡았다. 그러자 백제는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고, 한성은 신라가 차지하였다. 이어서 백제와 고려는 서로 공격을 주고 받았다. 백제는 왜의 지원을 받아 가라와 함께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크게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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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 신라, 任那³ 병합
562년 신라는 任那³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에 격분한 왜(倭)는 대장군 기남마려숙녜와 부장군 하변신 경부를 보내어 각각 치리와 거증산으로부터 출동하여 신라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도 군사를 모아 대응하였으나 패하고 만다. 이에 기남마려숙녜는 백제로 돌아갔으나 하변신 경부는 이곳 저곳을 다니며 성들을 함락시키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다 한때 실수를 하는 바람에 신라군에 패하고 따라간 부인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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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任那² 十國
新羅打滅任那官家 一本云廿一年任那滅焉 總言任那 別言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散半下國 乞湌國 稔禮國 合十國 신라가 임나관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어떤 책에서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찬국, 염례국 등 모두 열 나라이다. ▐ 任那²의 구성은 계속 변하였고 마지막에는 10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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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1-03 일본서기(720)
遣坂田耳子郞君 使於新羅 問任那滅由 반전이자랑군을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임나를 멸망시킨 사유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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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1-04 일본서기(720)
天皇寢疾不豫 皇太子向外不在 驛馬召到 引入臥內 執其手詔曰 朕疾甚 以後事屬汝 汝須打新羅 封建任那 更造夫婦 惟如舊日 死無恨之 천황이 병환으로 자리에 누웠다. 황태자는 밖에 나가 없었으므로 역마로 불러들였다. 누워 있는 내전에 불려 들어가니, 그의 손을 잡고 명하기를 “내 병이 심하니 이후의 일을 너에게 맡긴다. 너는 반드시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 봉하라. 다시 서로 화합하여 옛날과 같이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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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 북사(659)
왜왕 다리사북호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아뢰길 "듣자오니 바다 서쪽 보살천자께서 불법을 다시 일으키신다 하니 사신을 보내 조배드립니다. 아울러 중 수십 명이 여기 와 불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하였다. 그 국서에는 '해 뜨는 곳 천자가 해 지는 곳 천자에게 글을 보내오. 별일 없으신가?' 어쩌고 저쩌고 하였다. 황제가 글을 보고 언짢아 홍려경에게 "오랑캐가 보낸 글이 무례하구나. 다시는 이런 말이 들리지 않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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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수서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並敬仰之恆通使往來 신라와 백제는 모두 왜(倭)를 대국으로 여기며 진귀한 물건이 많아서 공경하고 우러러보며 항상 사신을 통하고 왕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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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1793 이덕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위신공황후(僞神功皇后)가 무내 숙녜(武內宿禰)를 거느리고 악포(鰐浦)로부터 신라를 습격하였는데, ... 49년에 신라가 오래 통신(通信)하지 않으므로, 황전별(荒田別)과 녹향별(鹿香別)을 장군(將軍)으로 삼고 백제의 구저(久氐) 등을 길잡이로 삼아 신라를 격파하고, ... 임나왕(任那王)을 궁창(宮倉)으로 삼고 7국ㆍ4읍을 임나에 붙여 궁장(宮藏)으로 삼았다. ▐ 일본서기의 이야기를 옮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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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5-1864 한치윤, 해동역사(海東繹史)
신공황후 49년에 신라가 오랫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자 황전별(荒田別) 및 녹아별(鹿我別)을 장군으로 삼고 백제 사람인 구저(久氐) 등을 향도(鄕導)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여 ... 韓國의 궁창(宮倉)을 정하여 임나(任那)의 왕을 궁창수(宮倉首)로 삼은 다음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 7국과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등 네 개의 큰 고을을 임나에 붙여서 궁장(宮藏)으로 삼게 하였다. ▐ 일본서기의 이야기를 옮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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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동국사략
대가야는 또한 任那라고도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344년 전에 新羅 眞興王이 그 땅을 멸하고 대가야군을 설치하였다. 대가야가 예전에 蘇那葛叱知를 日本에 파견하여 화친을 맺고 또 왕자 阿羅斯 등이 일본에 갔다. 그 나라에 南伽耶(소가야) 등 7국이 속하니 총칭하여 임나라 하였다. 대체로 가락과 임나는 하나의 부락이었다. 국력이 미약하여 신라, 百濟, 일본의 견제를 받았다. ▐ はやし たいすけ가 쓴 역사책을 참고했다.
5999#13142
 
1920 심상소학국사
임나의 여러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를 정벌하고 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였다. 신라, 고구려, 백제는 모두 일본에 조공을 바쳤으며 신라와 백제는 또 일본에 볼모를 두어 그 진심을 나타냈다.
5999#13146
 
1997 고등학교 교과서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의 백제는 마한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또,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 영산강 유역의 고고학적 양상에서 백제의 영향이 나타나는 시기는 6세기부터다. 그리고 낙동강 유역의 소국에 지배권을 행사했다고 기록에 나오는 나라는 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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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고등학교 교과서
가야 연맹도 5세기 초에 크게 변하였다.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되면서 김해, 창원을 중심으로 하는 남동부 지역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그 동안 낙후 지역이었던 북부 지역의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등지의 세력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5세기 후반에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새로운 맹주로 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이룩하였다. ● 가야보다 가라가 더 보편적인 명칭이다. 고령에는 가라가 있었고 김해에는 남가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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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那
19159
 
倭와 백제
백제는 신라에 비해 늦게 倭와 교류를 하기 시작했지만 4세기 말에 倭가 한반도로 진출하면서부터 급속히 倭의 영향권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백제와 倭의 친밀한 관계는 백제가 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5999#2411 COMMENT
 
倭와 신라 및 가라
신라는 倭의 설화에 등장하고 가라의 설화는 倭의 설화와 닮은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및 가라와 倭는 오래 전부터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라가 倭와 우호적이었던 데 반해 신라는 倭와 지속적으로 대립하였다.
5999#1898 COMMENT
 
고고학적  양상
고고학적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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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 양상
기록을 통해 추정한 임나의 범위와 고고학적 양상으로 나타나는 임나의 범위는 모순되지 않는다.
5999#1464 COMMENT
 
기타
용어별임나 지도 비교임나경영설 설문
 
왜는 처음부터 남이었나?
한국의 영산강 유역과 일본의 복강현은 동일한 고고학적 양상을 띤다. 또 왜의 설화에는 신라가 등장하고 가라의 설화와 닮은 부분도 있다. 신라의 한국통일 이전에는 신라나 백제가 고려와 왜를 달리 보지 않았다.
5999#2418 COMMENT
 
¦임나경영설 Quick Proof
흔히 임나경영설은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이야기로 알고 있는데, 한국과 고려 그리고 중국의 기록에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일본에서도 이제 임나경영설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본 교과서에는 여전히 임나경영설이 실려 있다.
5999#1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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